헤르만 파르칭거의 책 '인류는 어떻게 역사가 되었나'

"처음에 있었던 것은 '말(言)'이었다.

문자 이전에 말이 있었다는 것이다.

여기서 묻고 싶은 것은 문자 없이 말만 존재했을 때의 세계 모습이다.

이 책의 중심은 바로 '그'의 세계, 즉 문자 이전의 인간 세계가 된다.

"
독일 고고학자 헤르만 파르칭거(61)는 선사시대를 소환하기 위해 서문에서 말의 역사성부터 새롭게 환기한다.

통상적으로 학계는 문자 기록 유무에 따라 인류사를 '선사(先史)시대'와 '역사(歷史)시대'로 대별한다.

문자의 발명에 그만큼 큰 가치와 의미를 부여하는 것이다.

이에 따라 구석기 시대와 신석기 시대에 대한 인식은 청동기 시대의 그것보다 축소된 가운데 뒷전에 한참 밀려나 있다.

하지만 파르칭거는 이에 대한 비판적 견해를 확고히 드러낸다.

"인간이 무엇인가를 생산해낸다는 것은 이미 자신의 운명의 주인이 되어 역사를 만들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렇기 때문에 원시시대 조상들의 삶과 시간에서 역사성의 지위를 부정하고 '선사'라고 폄하하는 것은 잘못된 일이다.

"
그는 신간 '인류는 어떻게 역사가 되었나'에서 "올바른 역사 인식을 위해서는 수천 년, 수만 년 전의 시대에 접근할 수 있어야 한다"고 역설한다.

문자의 역사에 그치지 않고 말의 역사로 이해의 폭을 좀 더 넓혀보자는 뜻이다.

원제가 '프로메테우스의 아이들'인 이 책은 1천100쪽이 넘는 방대한 분량에 고고학, 고고유전학, DNA를 통한 고대 인구사 연구 등 전방위적 학문 성과를 포괄해 담아낸 선사시대 통사다.

스키타이 유적 발굴로 세계적 명성을 얻은 저자가 평생의 공력을 이 한 권에 집약했다.

일반적으로 기원전 4천 년에서 기원전 3천 년 무렵에 생긴 기호 체계를 문자의 시초로 본다.

하지만 현대 인류의 조상인 '호미니드'는 그보다 수백만 년 전에 아프리카에서 직립 보행하고 무언가를 움켜잡는 데 손을 사용하기 시작했을 때부터 신호, 상징, 그림을 이용한 의사소통 능력을 갖추고 있었다.

저자는 이번 책에서 선사시대 사람들의 삶을 섣불리 재구성하기보다 어떤 유물들이 발견됐는지 확인하는 데 주목한다.

다시 말해 시간의 퍼즐부터 하나하나 모아나간 것이다.

그러면서 개별적 정체성, 사유재산, 사후세계에 관한 의식의 등장, 나아가 영토와 지배 같은 추상적 범주를 이야기한다.

현생 인류의 발전에 결정적으로 기여한 것은 불의 사용이었다.

이와 더불어 인류는 썩은 짐승 고기를 먹음으로써 육식을 하게 됐고, 동물의 몸에서 고깃살을 먹기 좋게 떼어내기 위해 석기 제작을 하기 시작했다.

사냥, 도축 이후 문자 발명까지 인간의 역사를 살피다
사냥, 도축 이후 문자 발명까지 인간의 역사를 살피다
저자는 270만 년 전에 이뤄진 석기 제작을 인간 발달사에서 가장 큰 진보로 꼽는다.

돌멩이로 만든 이 단순한 도구가 문제 해결과 목표 지향적 사고의 증거로, 그때부터 인간의 역사는 인공 제작물을 지속적으로 최적화시켜왔다는 것이다.

그리고 200만 년 전에서 30만 년 전 사이에 출현한 호모 에렉투스와 호모 에르가스테르는 동물 사체를 먹던 데서 수렵 생활로 도약한다.

이로써 인간은 두뇌에 지방과 단백질, 인을 풍부하게 공급하게 돼 두뇌와 근육 능력을 진일보시킨다.

이는 인간이 아프리카에서 벗어나 멀리 아시아와 유럽 등지로 진출할 수 있는 바탕이 됐다.

지금으로부터 30만 년 전에서 4만 년 전까지는 네안데르탈인이 있었다.

이들의 정신사적 기여는 저승세계의 발견과 죽음의 새로운 방식이었다.

매장 문화와 함께 장례 의식도 이들에게서 나타났다고 저자는 말한다.

네안데르탈인은 현생 인류인 호모 사피엔스가 기원전 4만 년에서 기원전 1만3천 년 사이에 전 세계로 확산하면서 그만 자취를 감춘다.

호모 사피엔스는 네안데르탈인보다 성적으로도 더 조숙해 생식률이 훨씬 뛰어났다.

거기다 뼈로 만든 작살이 말해주듯이 어류를 포획하고 짐승을 가축화했으며, 바늘의 발명으로 옷을 지어 입음으로써 춥고 험준한 극지까지 진출할 수 있었다.

시신 안치 때 부장품을 함께 묻은 첫 주인공 역시 호모 사피엔스였다.

저자는 인간이 문자의 발명에 이르기까지 특유의 창의적 능력을 발휘해 환경에 최적으로 적응하고, 근본적인 대변화를 받아들였으며, 공동체의 막대한 성과를 조직하고, 인구 밀집 중심지에서 수반되는 각종 사회 문제에 훌륭하게 대응했다고 들려준다.

이와 함께 농경과 가축 사육으로 인한 집단 전염병, 환경 파괴 등을 거론하며 지구촌 발전의 이면에는 어두움도 있었다고 상기한다.

이는 한참 기승을 부리는 요즘의 코로나19 상황을 거시적으로 바라보게 하기도 한다.

수많은 역경 속에서 위기를 극복하고 새롭게 출발한 선대의 인류처럼 현생 인류 역시 창의적이고 진취적인 능력을 발휘할 수 있을 것 같아서다.

글항아리. 나유신 옮김. 1128쪽. 5만4천원.
사냥, 도축 이후 문자 발명까지 인간의 역사를 살피다
/연합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