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보기가 역겨워 가실 때에는~' 恨이 서려 있는 김소월 시, 록 음악으로 다시 태어나다
연분홍 진달래가 자꾸 말을 걸어오는 봄날이다. 꽃노래도 흥얼거려진다. ‘진달래꽃’ 노래는 시인 김소월(1902~1934)의 시에 곡조를 붙였다. 소월(素月)은 본디 흰 달을 뜻한다. 서른셋, 그는 어찌 그 나이에 이 깊은 사유(思惟)의 응결체를 본래 이름(김정식)보다 더 또렷하게 남겼을까? 2003년 우지민과 루시아가 가사로 다듬고, 우지민이 곡을 붙여 마야가 부른 이 노래엔 민족의 서정과 한이 서려 있다.

나 보기가 역겨워 가실 때에는/ 말없이 고이 보내 드리오리다/ 나 보기가 역겨워 가실 때에는/ 죽어도 아니 눈물 흘리오리다/ 날 떠나 행복한지 이제 그대 아닌지/ 그댈 바라보며 살아온 내가 그녀 뒤에 가렸는지/ 사랑 그 아픔이 너무 커 숨을 쉴 수가 없어/ 그대 행복하길 빌어 줄게요/ 내 영혼으로 빌어 줄게요(1절)

진달래꽃 시는 1922년 7월 《개벽》 25호에 발표됐다. 당시 20세였던 소월은 대체 어떤 임과 이별을 했을까. 그의 아버지는 소월이 두 살 나던 1904년 정주와 곽산을 잇는 철도를 부설하던 공사장에서 일본인들에게 폭행당해 정신이상자가 됐다. 할아버지와 어머니 밑에서 자란 소월은 오산학교 2학년이던 1916년 14세에 할아버지 친구 홍명희의 딸 홍단실과 결혼했다. 당시 그는 오순이라는 세 살 연상의 소녀와 연정을 나누고 지내던 터였다고 한다.

3·1 만세운동 후 오산학교가 문을 닫자 배재고등보통학교로 편입해 졸업하고 1923년 일본 도쿄상과대(히토쓰바시대 전신)로 유학을 갔으나, 그해 9월 관동대지진으로 귀국한다. 이후 김동인 등과 ‘영대’ 문학동인 활동을 하지만, 조부의 광산사업이 실패하고 자신이 경영하던 동아일보지국도 실패해 곤궁에 빠진다. 삶의 의욕을 잃고 술만 마시다 1934년 12월 24일, 32세로 요절했다.

2012년 시인세계는 문학평론가들이 뽑은 한국 대표시집을 조사했다. 75명에게 각각 10권의 시집을 고르도록 한 결과 《진달래 꽃》 《화사집》 《사슴》 《님의 침묵》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 순으로 선호했다. 진달래꽃 시에 곡을 붙인 원조는 손석우(1920~2019)다. 전남 장흥 출신인 그는 목포고등상업학교를 졸업하고 1941년 KPK악단장 김해송의 소개로 조선연예주식회사에서 기타 연주를 시작한 한국 대중음악계의 대부다.

그가 1958년 박재란이 부른 ‘진달래꽃’에 처음으로 곡을 붙인 것이 소월 시가 대중가요로 변신한 첫 사례다. 이 노래는 떠나가는 임의 귀로에 진달래꽃을 듬뿍 뿌리겠다는 의지가 결연하다. 소월의 가슴 속에는 무슨 사랑이 익었을까.

'나 보기가 역겨워 가실 때에는~' 恨이 서려 있는 김소월 시, 록 음악으로 다시 태어나다
사랑이 익으면 가슴 속의 별이 된다. 그 별이 글자로 탄생한 것이 시(詩)다. 소월의 가슴 속 별은 오산학교 시절 알고 지낸 오순이라는 여인이었으리라. 그 오순을 뒤로하고 홍단실과 결혼한 자기 자신을 ‘나를 버리고 가신 임’으로 역설한 시가 진달래꽃이 아닐는지. 노래를 부를 당시 28세였던 마야, 본명 김영숙은 1975년 경기 남양주에서 태어나 서울예술대 연극과를 졸업했다. 2003년 이 노래로 데뷔했다. 이후 그는 폭발적인 가창력과 풍부한 감성, 라이브에서 단연 돋보이는 무대 매너로 여성 대표 로커가 됐다.

유차영 < 한국콜마 전무이사·여주아카데미 운영원장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