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96년 에드워드 제너가 처음으로 천연두 예방접종을 하는 장면. /미래의창  제공
1796년 에드워드 제너가 처음으로 천연두 예방접종을 하는 장면. /미래의창 제공
병자호란을 일으킨 청나라 태종 홍타이지는 47일 만에 조선의 항복을 받아내고 ‘삼전도의 치욕’을 안겼다. 그리고는 서울에 입성하지도 않은 채 곧장 심양으로 돌아갔다. ‘청태종실록’에 따르면 마마(천연두)를 피해 먼저 돌아간 것(避痘先歸·피두선귀)이라고 한다. 당시 청나라 군대 안에서 마마가 발생했고, 몽고족과 만주족이 마마에 특히 취약해서였다. 역사에 가정은 없다지만, 당시 홍타이지가 마마에 걸렸다면 역사는 어떻게 바뀌었을까.

《질병이 바꾼 세계의 역사》는 페스트, 콜레라, 천연두, 매독, 결핵 등 인류 역사를 뒤흔든 질병과 함께 정치지도자를 비롯한 유명 인사들을 괴롭힌 질병과 그로 인한 죽음을 살펴본다. 저자의 집필 의도는 지도자의 질병에 방점을 찍고 있지만,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이 대유행인 터라 관심은 전염병에 더 쏠릴 수밖에 없다.

영국 런던 소호 지역의 브로드윅가(옛 브로드가)에는 손잡이가 제거된 펌프가 하나 있다. 19세기 수많은 사람의 목숨을 앗아갔던 콜레라가 처음 발병하고 해결된 과정을 기념하기 위한 ‘브로드가의 펌프’다.

1817년 인도에서 처음 대규모로 발생한 콜레라는 아시아를 휩쓸었고 7년 뒤에는 지중해 동부로까지 번졌다. 대륙 곳곳을 누비던 군인들이 병원균 전파자였다. 1930년 러시아에 창궐했던 콜레라는 폴란드와 프로이센 등 유럽 중서부를 강타했다. 철학자 헤겔도 이때 희생됐다.

[책마을] 역사상 최악의 전염병은 '美人의 병' 폐결핵이었다
영국으로 건너온 콜레라는 런던 소호 지구에서 유례없는 속도로 빨리 퍼졌다. 다닥다닥 붙어 있는 49개 주택에 860명이 콩나물시루처럼 빽빽하게 살았던 브로드가에선 단 며칠 사이에 700명 이상이 목숨을 잃었다. 당시 유명한 의사 존 스노는 희생자 대부분이 브로드가의 펌프로 길어 올린 물을 마셨다는 점에 주목해 콜레라가 수인성 전염병임을 밝혀냈다. 펌프 손잡이를 제거해 사용을 금지하자 영국에서만 2만여 명의 목숨을 앗아간 역병이 서서히 잦아들었다고 한다.

1495년 2월, 적국의 수도에 입성한 프랑스군은 나폴리 미녀들과 즐거운 시간을 가졌다. 몇 달 뒤 그들에게 끔찍한 일이 벌어졌다. 성기 주변에서 시작된 증상이 온몸으로 퍼져 죽거나 극심한 고통을 겪어야 했다. 매독이라는 새로운 질병이었다.

사람들이 ‘악성 천연두’라고 불렀던 매독은 샤를 8세의 프랑스군 진군 속도와 비슷하게 퍼졌다. 당시 프랑스에서는 이를 ‘나폴리 질병’이라고 불렀고, 이탈리아와 독일, 영국에서는 ‘프랑스 질병’이라고 불렀다. 네덜란드에서는 ‘스페인 질병’, 폴란드에서는 ‘독일 질병’, 러시아에서는 ‘폴란드 질병’이라고 불렀다. 이름만으로도 매독의 진행 경로를 짐작할 만하다. 특정 국가나 지역의 이름을 붙여 발병의 책임을 인접국으로 떠넘기는 건 고금(古今)이 매한가지다.

매독은 15세기 이후 약 400년간 유럽에서만 1000만 명가량의 희생자를 냈다. 19세기 말 파리 인구의 15%가 매독 환자였다고 한다. 교황을 비롯한 고위 성직자, 귀족은 물론 보들레르, 플로베르, 모파상, 마네, 고갱, 슈베르트, 하이네 등의 문화예술인도 매독으로 고생했다.

전염병의 역사를 보면 그야말로 무시무시하다. 천연두는 20세기에만 약 3억 명, 역사적으로는 5억 명의 사망자를 낸 것으로 역사학자들은 보고 있다. 20세기 초의 스페인 독감은 전 세계적으로 약 5억 명이 감염돼 최소 2500만 명, 최대 1억 명이 사망한 것으로 추정된다.

역사상 가장 많은 희생자를 낸 전염병은 결핵이다. 지난 200년 동안에만 약 10억 명이 결핵으로 사망했고, 20세기 주요 사망원인 1, 2위를 다퉜다. 그런데도 빅토리아 시대(1837~1901) 이후 폐결핵은 ‘아름다운 질병’으로 여겨졌다. 새하얀 피부를 선호하던 당시 미인상이 창백해진 환자의 외모를 아름답다고 생각하게 한 것. 보티첼리의 대표작 ‘비너스의 탄생’ 모델인 시모네타 베스푸치는 피렌체의 대표 미인이었으나 폐결핵으로 사망했다. 에드바르 뭉크는 폐결핵에 걸려 죽음을 앞둔 여동생을 화폭에 담았다. ‘아픈 아이’다. 다보스포럼으로 유명한 스위스의 다보스는 폐결핵 환자를 위한 요양지였다.

1347년부터 5년 동안 유럽 인구의 30%, 대략 1800만 명이 목숨을 잃은 페스트는 중세의 대재앙으로 기록됐다. 영국에서는 인구의 40~50%가 죽었고, 프랑스 노르망디 지역에선 인구의 70%가 감소했다는 기록이 있다. 환자의 피부를 시커멓게 괴사시켜 흑사병으로 불렸다. 페스트가 가장 공포스러운 전염병으로 기록된 것은 단기간에 막대한 사망자를 냈기 때문이다. 흑사병이 지나간 뒤 생존자들은 임금과 사회적 지위가 향상되는 이점을 누렸다고 한다.

의사이자 역사학자인 저자는 히틀러, 레닌, 루스벨트, 케네디 등 주요 인물이 겪었던 질병과 그로 인해 역사가 어떻게 달라졌는지도 보여준다. 1988년 폐결핵 진단을 받은 넬슨 만델라가 2년 후 아파르헤이트 정권의 몰락과 함께 석방되지 않았다면 폐결핵이 만연했던 로벤섬의 감옥에서 더 일찍 생을 마감했을지도 모른다.

서화동 선임기자 fireboy@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