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경 신춘문예 등단 6년 만에 첫 시집 낸 이소연

임신·출산·육아체험은 물론
약자·환경·동물까지 아울러
인류애적 페미니즘 녹여내

"한경 신춘문예는 재도약의 계기'
‘2014 한경 신춘문예’를 통해 등단한 이소연 시인이 첫 번째 시집 《나는 천천히 죽어갈 소녀가 필요하다》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김영우 기자 youngwoo@hankyung.com

‘2014 한경 신춘문예’를 통해 등단한 이소연 시인이 첫 번째 시집 《나는 천천히 죽어갈 소녀가 필요하다》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김영우 기자 youngwoo@hankyung.com

“이제 우리 사회도 과거 침묵을 강요하던 데서 미투 운동 등을 통해 누구든 말할 수 있는 세상이 됐잖아요. 저도 그동안 시를 통해 작은 목소리라도 뭔가를 말해 왔어요. 그게 이번에 시집으로 묶여 나오면서 제 안의 상처들이 조금씩 봉합되는 느낌이 들어요.”

‘2014 한경 신춘문예’ 시 부문에 당선된 이소연 시인(37)이 첫 번째 시집 《나는 천천히 죽어갈 소녀가 필요하다》(걷는사람)를 냈다. 등단 6년여 만이다. 2013년 시작된 ‘한경 신춘문예’를 통해 등단한 시인이 시집을 낸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11일 서울 중림동 한국경제신문사를 찾은 이 시인은 첫 시집에 수록된 57편의 시에 “지금까지 여성으로서 살아오면서 겪었던 경험과 상처가 녹아 있다”고 말했다.

시집엔 ‘2014 한경 신춘문예’ 당선 시 ‘뇌태교의 기원’도 실려 있다. 그가 실제로 아들을 임신했을 당시 썼던 시다. “그 시가 ‘이소연’이란 삶을 재도약하게 한 시작점이 됐어요. 당선 무렵 출산한 후 육아로 2년간 공백기를 거쳤는데 혼자 시를 쓰기가 힘들었죠. 그런데 이후 이서하, 주민현 등 한경신춘문예로 당선된 후배 시인들을 만나 큰 힘이 됐어요. 함께 동인 ‘켬’을 꾸리고 낭독회도 여러 번 개최했죠. 한경 신춘문예가 제 삶의 원동력이 됐습니다.”

수록시 ‘밑’의 첫 시구에서 따온 ‘나는 천천히 죽어갈 소녀가 필요하다’란 제목엔 임신 직후부터 시를 쓰며 변화해 온 시인의 모습이 담겨있다고 했다. “한마디도 못했던 내 안의 나약했던 소녀가 천천히 빠져나간 뒤 그렇게 남은 내가 세상을 조금이나마 바꿨으면 하는 생각에서 지었죠. 과거 모든 상처를 이 소녀에게 투영시켰습니다. 그런 내 속의 소녀가 죽어가면서 그 안의 상처도 함께 지워버리는 거죠.”

선우은실 문학평론가는 이 시인의 첫 시집에 대해 “이제 막 시작된 ‘말하기’의 시도”라며 “시들이 세상을 어둡게 인식하게 된 계기를 더듬으면 읽는 이도 함께 어두워지지만 이내 시인은 그 세상에 잠식되지 않고 다시 뭔가를 발언하기 때문”이라고 평했다. 이에 대해 이 시인은 “어릴 적부터 주위 사람들이 세상에 당하는 것을 보고도 말하기 주저했다”며 “침묵으로 인해 생기는 피해에 맞서 이제 미약하나마 시를 통해 말하기를 시도한 것”이라고 말했다.

시집 전체를 아우르는 주제의식은 페미니즘이다. 편가르기식 극단적 페미니즘이 아니라 가족 안에서 아내와 엄마로서의 여성과 어린이, 반전(反戰), 환경 등에 대한 인류애적 페미니즘이다. 그는 “임신이나 출산은 원래 아름답고 풍요로운 광경이어야 하지만 실제론 신체적 변화로 인한 상처와 이상한 불편만 느꼈다”며 “몇 년 전 터진 미투 운동이 사회적 약자에 대한 시들을 다시 쓰게 했다”고 말했다.

시집 1부에 나오는 연작시 ‘철’은 유년기 겪은 ‘철’에 대한 상처이자 ‘반전’에 관한 시들이다. “바다와 제철소가 있는 경북 포항에서 태어났어요. 첫 시집인 만큼 시작은 바닷가 근처 철조망에 걸려 볼이 찢어졌던 제 어릴 적 이야기부터 하고 싶었죠. 살을 찢는 전쟁으로 대변되는 철의 폭력성, 나아가 날카로운 세상에 방치되고 익숙해지며 생겼던 제 상처에 대한 이야기죠.”

그는 “이제 화가 나야 시를 쓴다”며 “갑자기 억울해지면 화가 나고 그 화를 세련되게 표출할 수 있는 수단이 시”라고 했다. “원래 저는 마음도 좁고, 말하기 주저하고, 주위 사람들의 생각을 많이 신경 쓰는 사람이었어요. 하지만 시인이 된 후 여성뿐 아니라 사회적 약자와 소수자, 환경, 동물까지 광범위하게 이야기하게 됐습니다. 시는 이제 제게 쓰지 말라고 해도 그만둘 수 없는, 손을 묶어놔도 어떻게든 써야 하는 존재가 됐습니다.”

은정진 기자 silver@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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