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산 세계꽃식물원

봄기운이 코끝을 간질이는 3월이면 화사한 봄꽃만큼 그리운 게 없다.

봄꽃을 시샘하는 추위는 언제 찾아올지 모르고, 기후 위기 시대를 나는 철모르는 꽃은 따뜻한 한겨울에 진즉 피어버리기도 했다.

이런저런 걱정 없이 언제고 꽃과 함께 봄맞이를 할 수 있는 곳을 조금 먼저 찾았다.

[지금, 여기] 꽃샘추위·미세먼지 피해 봄꽃맞이
충남 아산시의 끄트머리에 있는 아산 세계꽃식물원은 논으로 둘러싸여 있다.

갑작스러운 한파가 지나가고 다시 미세먼지가 찾아온 2월의 어느 날, 낮 기온은 영상 10도를 오르내렸다.

논은 아직 올해의 농사 준비가 시작되기 전이어서 겨울의 썰렁한 모습 그대로였다.

포근한 날씨에 썰렁함을 느끼는 건 빈 논 때문만은 아니었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코로나19)의 여파가 사회 전반에, 사람들의 일상에 퍼져 있을 때였다.

특히 우한에서 온 교민들이 임시로 머물렀던 아산경찰인재개발원이 이곳에서 멀지 않았다.

겨울을 난 뒤 일찍 피는 봄꽃을 보러 오는 사람들로 가장 붐볐어야 할 시기인지라 썰렁함이 더했다.

[지금, 여기] 꽃샘추위·미세먼지 피해 봄꽃맞이
◇ 튤립 잔치는 시작됐다
날씨와 어울리지 않는 썰렁함에 마음이 무거웠던 것도 잠시, 입구에 나와 꽃봉오리를 열기 시작하고 있는 하얀 튤립을 보자마자 이내 얼굴 근육부터 풀어졌다.

가을에 심어 겨울을 견딘 뿌리에서 꽃을 피우는 튤립은 온실의 한자리를 화사하게 빛내고 있었다.

여리여리한 하양과 연보라도, 부드럽고 따뜻한 노랑도, 강렬한 빨강도 제각각 황홀했다.

꽃에 얼굴을 가까이 갖다 대거나 튤립 화분 사이에서 꽃에 묻힌 사람들의 표정도 꽃만큼이나 밝았다.

남기중 식물원장의 안내로 알뿌리를 보관하는 냉장창고와 막 싹을 틔우기 시작한 어린 튤립이 자라고 있는 재배 온실까지 둘러봤다.

제철인 4∼5월이 되면 온실 주변 야외 정원을 가득 채우게 될 테다.

세계 최초의 '거품 경제' 현상으로 꼽히는 튤립 파동이 17세기 네덜란드에서 벌어진 일이어서 튤립의 원산지를 네덜란드로 오해하는 경우도 있지만, 튤립은 중앙아시아 고원 지대에서 자생하던 꽃이었다.

당시 세력을 넓힌 오스만 제국(터키)을 통해 유럽으로 건너갔고, 특히 네덜란드에서 인기를 끌었다.

식물원의 튤립도 네덜란드에서 구근을 들여온다.

튤립을 포함해 백합, 아이리스 등 구근류 화훼는 이곳의 주요 생산 품종이기도 하다.

튤립 정원과 함께 '고개를 끄덕이는 바이올렛'으로 불리는 스트렙토칼펠라 삭소럼이나 화려한 베고니아가 만드는 꽃 터널은 가장 인기 있는 포토존이었다.

[지금, 여기] 꽃샘추위·미세먼지 피해 봄꽃맞이
◇ 오감을 열어볼 것
약 2만7천㎡에 달하는 국내 최대 규모 실내 온실에서 3천 종의 식물들 사이를 돌아다니다 보면 시간 가는 줄 모르게 된다.

온실에 들어서는 순간부터 잎의 초록색과 꽃의 알록달록한 색이 시각을 자극하고, 허브를 살며시 쓰다듬을 때 공기로 퍼지거나 손에 남는 향기에 절로 취한다.

오일로만 알고 있던 티트리의 종잇장 같은 기둥을 살짝 만져보니 가쓰오부시처럼 포슬포슬하다.

남 원장이 따 준 새빨간 베고니아 잎을 입에 넣고 씹으니 강렬한 신맛이 침샘을 자극했다.

베고니아는 비빔밥이나 샐러드 등에 쓰이는 대표적인 식용 꽃이다.

온실 안 연못의 물소리와 사람들의 감탄 소리, 아기들의 웃음소리도 즐겁게 귀에 들어왔다.

식물의 초록색만으로도 즐겁고 나무가 뿜어내는 피톤치드 가득한 숲에서 숨 쉬는 행복은 이미 알고 즐기는 편이었지만, 이곳 식물원에서 새로운 기쁨이 늘었다.

발레리나를 닮은 푸크시아, 패션프루트를 만들어 내는 시계초, 물기라고는 없어 보이는 마른 가지에서 하얗고 빨간 꽃이 팝콘처럼 피어있는 호주 매화, 새우를 닮은 붉은새우초와 황금새우초처럼 그 모양이 특이한 꽃들은 한참씩 들여다봤다.

[지금, 여기] 꽃샘추위·미세먼지 피해 봄꽃맞이
더 큰 기쁨은 처음 맡아보는 향기였다.

꽃집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동글동글한 잎의 유칼립투스 옆에 있던 대나무처럼 길쭉한 유칼립투스 잎에서는 레몬 향이 강렬하게 뿜어져 나왔다.

코알라가 주식으로 삼는 것도 바로 이 길쭉한 잎의 유칼립투스였다.

함소화 향은 더욱더 놀라웠다.

목련과에 속해 비슷하게 생겼지만 훨씬 앙증맞은 크기의 연노란 꽃에서는 진짜 바나나보다 더 부드럽고 달콤한 바나나 향기가 났다.

남 원장과 함께 한 바퀴 둘러본 뒤, 함소화의 향기를 다시 한번 맡고 싶어 혼자 찾아 나섰지만, 위치를 기억할 수 없어 온실을 뱅뱅 돌았다.

어느 순간 강렬한 향기가 코끝을 스쳤고, 아니나 다를까 그곳에 함소화가 있었다.

무리를 이룬 작은 보랏빛 꽃에서 달콤한 바닐라, 초콜릿, 헤이즐넛 향을 뿜어내는 헬리오트로프도 인상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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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Life is a Flower, 삶이 꽃이다
식물원이 유럽에서 들여오는 건 튤립 구근만이 아니다.

남 원장은 '꽃을 즐기는 문화'를 키우고 싶다고 강조했다.

화훼 농가들이 모인 영농조합이 재배 온실을 식물원으로 꾸미고 관람객들에게 개방한 이유다.

재배 온실을 개조한 식물원은 직사각형의 꾸밈없고 투박한 모양이다.

건축가가 설계해 지은 식물원처럼 멋들어지지도 않다.

하지만 이곳에서는 커피나무나 열대 과일나무, 다른 대륙에서 자라는 나무처럼 주변에서는 볼 수 없는 희귀한 식물들뿐만 아니라 꽃집에서 흔히 살 수 있고, 집에서 쉽게 가꿀 수 있는 꽃과 나무들이 365일 피고 지고 자란다.

임시 화분에서 자라는 것들은 판매용으로 기르는 것이고, 공중에 가득 매달려 터널을 이루는 베고니아 화분 중 일부 자리가 비어있는 건 이미 판매됐기 때문이다.

'깔끔하게 잘 꾸며놨다'는 인상을 주기보다는 식물의 생장과 유통 주기를 자연스럽게 보여준다.

20인 이상 단체는 예약하면 원예 박사인 남기중 원장의 꼼꼼하고 흥미로운 설명과 안내로 더욱 알차게 둘러볼 수 있다.

[지금, 여기] 꽃샘추위·미세먼지 피해 봄꽃맞이
특별한 곳에서 잘 가꾸어 놓은 식물을 그저 보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생활 속으로 들여다 놓고 직접 가꾸며 즐기는 문화를 확산하고자 영농조합은 온실 식물원에 이어 자회사 리아프(LIAF)를 만들기도 했다.

'삶이 꽃'이라는 뜻의 'Life is a Flower'의 약자다.

삶 속에서 꽃이 기쁨과 위로, 즐거움이 되길 바라는 마음이 담겼다.

모든 관람객에게 다육 식물을 증정하는 것도 같은 이유다.

리아프가 운영하는 가든 센터에서는 집에서 키울만한 식물을 저렴한 가격에 판매하고, 크기가 맞는 화분까지 같이 사서 바로 분갈이를 할 수 있다.

리아프는 구성원 70% 이상이 60세 이상인 고령자친화기업이기도 하다.

현재 업무는 화훼를 생산하고 식물원을 조성하는 일이지만, 체험 교육 도우미나 꽃 해설 등으로 확대할 예정이다.

꽃 비빔밥을 판매하는 식당과 카페도 함께 운영하고 있다.

널찍한 휴식 공간 역시 초록색 식물과 나무 소재 의자로 편안하게 꾸며져 있고, 대형 화목 난로에서 구워내는 군고구마도 인기라고 한다.

꽃 비빔밥은 20인 이상 단체 관람객에게 사전 예약으로 판매한다.

[지금, 여기] 꽃샘추위·미세먼지 피해 봄꽃맞이
※ 연합뉴스가 발행하는 월간 '연합이매진' 2020년 3월호에 실린 글입니다.

/연합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