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걷고 싶은 길] 눈 내린 대관령 '국민의 숲길'
강릉 바우길의 여러 코스 중에서도 대관령 '국민의 숲길'은 명품 길이다.

전나무, 잣나무, 잎갈나무, 자작나무…. 하늘을 찌를 듯 쭉쭉 뻗어 올라간, 늠름하고 잘생긴 나무가 울창한 숲길이 10㎞나 뻗어 있다.

이곳을 걸어본 이들은 그 매력을 쉬이 잊지 못한다.

눈이 무릎 높이까지 하얗게 쌓인 숲은 장엄한 아름다움이었다.

강릉 바우길은 제주 올레길 못지않게 사랑받는 길이다.

지역 주민, 관광객, 걷기 좋아하는 '뚜벅이'들이 많이 찾는다.

'바우'는 바위를 뜻하는 강원도 사투리다.

강원도와 강원도 사람을 가리키는 정다운 말이 '감자바우'다.

바우(Bau)는 손으로 어루만져 병을 낫게 하는 바빌로니아 신화 속 여신의 이름이기도 하다.

바우길을 걷는 사람이 바우 여신의 축복을 받은 것처럼 몸과 마음이 건강해지길 바라는 마음을 명칭에 담았다.

바우길은 소설가 이순원이 지은 이름이다.

바우길은 총연장 400㎞로, 강릉바우길 17개 구간, 대관령바우길 2개 구간, 울트라 바우길, 계곡바우길, 아리바우길로 이루어져 있다.

바우길은 멀리 바다를 바라보며 산맥 꼭대기의 등줄기를 밟고 걷는 길, 산맥에서 바다로 나아가는 길, 바다에서 바다를 따라 걷는 길, 바다와 숲길을 번갈아 걷는 길 등 코스가 다채롭다.

어떤 길도 강원도의 자랑인 금강소나무 숲이 70% 이상 펼쳐져 있고, 모든 길의 약 70%는 숲속의 그늘 길이다.

국민의 숲길은 대관령바우길 2개 구간 중 하나다.

강원도 평창군 대관령면 횡계리 일대에 자리 잡고 있는데 신재생에너지전시관 → 국민의숲길 → 제궁골(잎갈나무숲길) → 바우길 1구간/2구간 갈림길 → 신재생에너지전시관으로 이어진다.

길이는 약 10㎞로, 걷는 데 4시간 정도 걸린다.

이 길은 잘 가꾼 숲길의 전형으로, 우리나라 산림 조성의 역사를 보여준다
[걷고 싶은 길] 눈 내린 대관령 '국민의 숲길'
◇ 형·누나가 심은 나무 숲길
국민의 숲길 시작 지점인 신재생에너지전시관을 출발해 숲을 향해 계단을 오르면 1975년 개통된 영동고속도로 준공기념비가 나온다.

영동고속도로가 새로 확장 건설된 후 왕복 2차선이었던 구 영동고속도로는 지방도로로 바뀌었다.

신재생에너지전시관은 옛 영동고속도로 대관령휴게소 자리에 지어져 있다.

숲길이 시작되자 길 양옆으로 눈이 약 50㎝ 높이로 쌓여 있다.

올겨울엔 유독 눈이 적었는데 우리가 방문하기 직전 눈이 몇 차례에 걸쳐 많이 내렸다.

길은 이미 여러 사람이 지나다닌 탓에 적당히 단단해져 걷기에 불편하지 않았다.

아이젠을 신고 걸으니 미끄러질 염려가 없었고, 발밑의 느낌이 푹신해 오히려 쾌적했다.

출발 지점에서 만난 등산객들은 어느 방향으로 갔는지 보이지 않는다.

우리 일행 외 아무도 없는 하얀 숲길을 걷는 기분이 나쁘지 않다.

국민의 숲길 '구간지기'인 최종서 해설사는 눈이 와도 걷는 사람들이 있느냐는 질문에 눈길을 좋아하는 등산객이나 뚜벅이가 적지 않다고 말했다.

이들은 하얀 눈밭에 자신의 발자국 내는 걸 좋아하고, 개중에는 눈이 온다는 예보가 있으면 전날 도착해 숙박하면서까지 다음 날 일찍 눈길을 걷는 사람도 있다고 한다.

등산 경험이 좀 있고, 돌발 상황에 대비해 철저히 준비한다면 눈길 걷기가 크게 위험하지 않을 것 같다는 소견을 말해 보았다.

눈이 오면 길이 보이지 않기 때문에 매우 조심해야 한다는 게 돌아온 답이다.

계곡이나 물길 위의 눈을 잘못 디디면 눈이 무너져내리면서 빠져나오지 못하는 경우가 있다고 한다.

아무도 다니지 않은 '생눈' 위를 걷는 것은 단단한 눈길을 걷는 것보다 3배 정도 힘들기 때문에 탈진하기 쉽다.

눈길 산행에서 조난되는 이유는 대부분 탈진이다.

눈길은 여러 명이 함께, 조심해서 걸어야겠다.

[걷고 싶은 길] 눈 내린 대관령 '국민의 숲길'
마침내 본격적인 조림 숲이 시작됐다.

반세기 전에 조림된 전나무 숲이 나타났다.

키가 하늘 높이 치솟고, 굵은 전나무들이 적당한 간격으로 울창하게 심겨 있다.

40∼50년 전 우리의 형·누나들이 체육 시간 등에 나와 심었던 묘목들이 지금 이렇게 자라 숲을 이루고 있다.

국민의 숲에 인공 조림된 나무로는 전나무가 가장 많았다.

다음이 일본잎갈나무였다.

이깔나무라고도 한다.

이 나무는 한일수교 후 일본이 묘목을 지원해 조림됐다.

잣나무, 자작나무, 종비나무, 독일가문비나무, 낙엽송들도 조림돼 있다.

우리는 반세기 만에 조림에 성공한 몇 안 되는 국가 중 하나다.

한국의 조림 사례를 연구하거나 벤치마킹하기 위해 외국 관계자들이 적지 않게 방문한다.

그중에는 아프리카 출신도 있는데, 우리가 과거에 조림 지원을 받았듯이, 지금 우리가 개발도상국에 묘목을 지원한다.

전나무 숲이 끝나는가 싶더니 일본잎갈나무 숲이 바로 이어졌다.

일본잎갈나무는 전나무와 마찬가지로 소나뭇과의 침엽수인데 매년 잎을 떨구는 낙엽송이다.

그래서 여느 침엽수와 달리 푸르지 않고 잎이 없이 가지만 앙상했다.

상록 침엽수인 전나무와 소나무는 2년 만에 잎을 떨군다.

2년생 잎이 떨어지더라도 1년생 잎은 그대로 달려있기 때문에 잎이 지지 않는 것처럼 보일 뿐 낙엽 지는 것은 낙엽 침엽수나 활엽수와 크게 다르지 않다.

다시 전나무 숲이 시작됐다.

앞서 본 것보다 나무가 더 굵고 숲이 더 크다.

조림할 때 너무 조밀하게 심은 것은 간벌한다.

적당히 자란 것은 베어내 목재로 쓰고 다시 묘목을 심는다.

우리나라의 조림은 산을 푸르게 가꾸기 위한 '녹화용'이었지 '재목 확보용'이 아니었다.

그 때문에 조림에 성공하고도 목재 자원은 매우 빈약하다.

요즘 조림은 재목 확보용이 많다.

숲 옆에 양묘장이 있었다.

이 지방 묘목이라야 강원도의 추위를 견디고 잘 자란다.

이 지역 묘목은 겨울에 추운 북한에서도 잘 자라기 때문에 북한에 지원되기도 한다.

국민의 숲에는 오전 10∼11시 사이에 강한 피톤치드가 나오기 때문에 이 시간에 숲을 걷는 게 건강에 좋다.

박테리아나 세균은 기온이 떨어지는 밤을 지내기 위해 나뭇가지와 잎으로 스며드는데, 나무들이 이것들을 없애기 위해 뿜어내는 강력한 살균 물질이 피톤치드다.

이 숲은 한여름에도 모기가 없고 시원해 국가대표 등 운동선수들의 훈련장으로 활용되기도 한다.

[걷고 싶은 길] 눈 내린 대관령 '국민의 숲길'
◇ 무릎까지 빠지는 '생눈' 길
숲길 중간에 식당이 하나 있어 식사하거나 휴식하기에 좋았다.

이 식당은 꿩고기 만둣국과 막국수가 별미인 것 같았다.

예전에 이 지역에는 꿩이 많았는데, 눈 오는 겨울엔 꿩 사냥이 아이들에게 큰 즐거움이었다고 한다.

꿩은 몸이 무거워 날다가 한번 떨어지면 다시 날지를 못하고 뛰어가기만 하는데 눈밭에서는 이마저 쉽지 않아 대가리를 눈밭에 처박고 사냥꾼의 처분(?)만 기다린다는 것이다.

우리가 숲길을 걸었던 날은 올겨울 들어 가장 추운 날이었다.

수은주가 영하 10도 이하로 떨어지고 체감온도는 훨씬 더 낮았다.

막국수가 먹고 싶어 차갑지 않고 따뜻하게 해줄 수 없냐고 물었다.

추위를 이기기 위해 몸속이 뜨거워졌을 땐 차가운 음식을 먹어야 한다고 한다.

여름에 더위에 맞서느라 냉해진 속을 따뜻하게 하기 위해 삼계탕을 먹는 원리와 같다고 한다.

시원한 막국수 한 그릇을 남김없이 싹 비웠다.

요기 후 다시 떠난 길은 아무도 걷지 않은 '생눈'이 무릎 높이까지 쌓인 계곡 옆 비탈길이었다.

걸음을 옮길 때마다 발을 무릎 높이까지 치켜올려야 하니 여간 힘들지 않았다.

딴생각하지 않고 발걸음에만 집중했다.

[걷고 싶은 길] 눈 내린 대관령 '국민의 숲길'
눈밭 위에 너구리 발자국, 토끼와 들쥐가 지나다닌 흔적이 보인다.

고라니가 물 마시러 계곡으로 내려간 발자국도 있다.

멧돼지가 지나간 자국도 여럿 나타났다.

다리가 긴 고라니의 보폭은 매우 컸다.

멧돼지는 눈밭에 도랑처럼 긴 홈을 남겼다.

다리가 짧은 멧돼지는 눈밭을 지날 때 배로 눈을 쓸면서 가기 때문에 생긴 흔적이다.

멧돼지는 이렇게 흔적을 남기고, 움직임도 느려 겨울철에 사냥하기 좋다.

난생처음 걷는 생눈 길은 쉽지 않았다.

그러나 인적 없이 온통 하얀 숲을 걷는 게 여간 상쾌하지 않았다.

'서정'과 '목가'는 이런 풍경에 어울리는 말일 것이다.

드디어 생눈 길이 끝나고 다른 등산객들을 국민의 숲길 위에서 만났다.

바우길 1구간을 걷는 이들이었다.

얼음처럼 투명하고 새파란 하늘에서 쏟아지는 햇빛이 좋아서였을까.

젊은 외국인 청년은 반소매 차림이다.

40∼50대로 보이는 남녀 수 십명이 떼 지어 지나간다.

동호인들인가보다.

눈이 쌓였든 말든 바우길이 좋은가 보다.

계절이 바뀌면 국민의 숲길을 다시 걸어봐야겠다.

신록과 녹음이 우거진 봄·여름, 단풍이 곱게 물든 가을에 국민의 숲은 또 어떤 모습을 보여줄 것인가.

※ 연합뉴스가 발행하는 월간 '연합이매진' 2020년 3월호에 실린 글입니다.

/연합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