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호·이정철 저 '역사책에 없는 조선사' 발간

1616년 7월 17일 경상도 예안(지금의 안동) 선비 김택룡 집에 먼 친척인 정희생이 넋이 나간 채 뛰어들었다.

어머니가 당시 지역을 덮친 전염병에 걸려 위급한 처지라면서 "약이라도 구할 수 없겠느냐"고 울부짖는 것이었다.

마을 어른으로 대접받는 김택룡이지만, 당장 뾰족한 수가 있는 것도 아니어서 "방법을 찾아보자"고 말하고는 돌려보냈다.

그러나 대책을 살필 새도 없이 다음날 정희생 어머니는 나무에 목을 매는 극단적 선택을 하고 말았다.

더는 아들에게 피해를 주고 싶지 않다는 모성애 발로였다.

김택룡은 마을 사람들을 불러모아 장례를 진행했다.

정신을 놓아버린 정희생이 발광해 날뛰지 못하도록 묶어놓은 채였다.

역병에 걸린 시신은 불태워야 하지만 위험을 무릅쓰고 매장한 것이 그나마 정희생에게 해 줄 수 있는 최대의 배려였다.

예나 지금이나 전염병은 공포와 불안, 불신을 불러온다는 것을 보여주는 이 이야기는 김택룡이 쓴 일기를 후손들이 엮은 '선조조성당일록(先祖操省堂日錄)'에 기록돼 있다.

'조성당'은 김택룡의 호다.

'기록의 나라' 조선의 조정이 왕조실록과 승정원일기, 일성록과 같은 기록을 후손에 전했다면 선비들은 일기를 남겼다.

하루하루 살아가는 이야기를 담은 생활일기는 물론 서원을 세우는 영건일기, 관직일기, 여행·전쟁 일기 등 종류도 다양하다.

'역사책에 없는 조선사'(푸른역사)는 조선 선비들이 쓴 일기 20권에서 '조선의 일상'을 길어낸다.

저자들은 한국국학진흥원이 보유한 일기 3천여 점을 데이터베이스(DB)로 구축하고 번역하는 작업에 참여한다.

책은 일기가 다룬 소재에 따라 국가, 공동체, 개인의 3부로 나눠 구성됐다.

왕조실록과 같은 공식 기록에서는 찾아보기 힘든 인간의 살 냄새가 그득한 삶의 모습을 담았다.

일기 내용을 그대로 번역하기보다는 그 시대 맥락에 대한 설명을 추가해 하나하나 완결된 이야기로 재구성했다.

가장 눈에 띄는 것은 당시의 부패상과 민초들의 억눌린 삶이다.

경상도 상주 출신으로 도산서원 원장이던 권상일이 남긴 '청대일기(淸臺日記)'에는 도산서원의 막강한 '재력'에 관한 기술이 나온다.

1733년 도산서원은 이황의 언행록이 재발간됐음을 알리는 고유제 행사를 성대히 치렀다.

언행록을 수정·간행하기 위해 선비 30여명이 몇 달을 기숙하는 데 든 숙식비와 종이 등 물품 비용, 800명에 이르는 고유제 참석자 대접 비용 등을 너끈히 치르고도 도산서원의 재정은 적자를 내지 않았다.

'사액서원'으로서 국가의 지원을 받는다고는 해도 이만한 비용을 감당하기는 쉽지 않은 일이었지만, '노비신공(奴婢身貢)' 덕에 가능했다.

노비신공은 자기 땅에서 농사를 짓는 외거노비들이 1년 수확에서 일정 정도를 주인이나 소속 기관에 세금처럼 내는 것을 말한다.

구체적인 숫자는 나오지 않지만, 도산서원에는 많은 외거노비가 있었다.

심지어 양인으로서 자원해 노비가 되는 '투탁(投託)'도 적지 않았다.

국가의 세금이나 군역의 부담이 과중해 차라리 노비가 되는 것이 나았기 때문이다.

선비들의 일기에서 길어 올린 조선의 일상사
또 다른 경상도 선비 김령이 남긴 '계암일록(溪巖日綠)'에는 '방납'의 폐단이 기록돼 있다.

방납은 지방에 부과되는 특산물인 공물을 조달하지 못할 경우 그 물건을 사서 납부하는 것을 말한다.

방납업자들은 이 과정에서 비싼 값에 물건을 팔아 폭리를 취하는 일이 많았지만 백성들은 울며 겨자 먹기로 방납업자들에게 공물을 사서 납부할 수밖에 없었다.

김광업을 비롯한 예안현 주민들은 지역 공물인 은어를 잡기 위해 그물을 준비해 며칠째 쏟아지는 비가 그치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나 어떻게 알았는지 새벽부터 들이닥친 아전들이 현감의 명이라면서 집마다 그물을 걷어 가 버리고 말았다.

방납업자와 결탁한 현감의 술책이었다.

김광업을 비롯한 주민들이 참다못해 들고일어나자 일이 커질 것을 염려한 현감은 "그물로 은어를 잡는 것은 허용해 줄 테니 다른 곳에 소문은 내지 말라"고 요구했고 주민들도 받아들여 그 선에서 사건은 마무리됐다.

선비들의 일기에서 길어 올린 조선의 일상사
백성들 허리를 휘게 하는 것은 각종 세금과 공물, 부역만이 아니었다.

당연히 정부에서 부담해야 할 외교관계 비용을 감당해야 하는 것도 백성들이었다.

계암일록에 따르면 예안 주민들은 '왜공(倭供)' 납부를 독촉하는 현감의 닦달에 시달리고 있었다.

'왜공'은 '왜(倭)에 바치는 공물'이라는 뜻으로 조선에 건너온 일본 사신들을 접대하고 그들과 무역에 활용하기 위해 비축하는 물건을 의미했다.

주민들이 왜공으로 납부해야 하는 물건 가운데 꿀과 들기름은 채취하고 만드는 데 시간이 걸리기 때문에 현감이 독촉한다고 해서 후딱 장만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주민들은 여기에다 이 지역에서 생산되지도 않는 농어까지 납부하라는 요구를 받았다.

이런 요구에 응하는 길은 방납업자에게 비싼 값을 주고 사는 것뿐이었다.

백성들은 왜뿐만 아니라 임진왜란이 끝난 후에도 함경도 북쪽 섬에 주둔하던 명나라 군대를 위한 주둔비용도 부담해야 했다.

바로 '당량(唐糧)'이다.

당량은 백성들의 부담을 가중하는 데서 그치지 않고 병자호란의 빌미가 되기도 했다.

책은 이밖에도 시집간 딸이 친정을 찾아 한 달 정도 머무는 '근친', 이것이 어려울 경우 안사돈들이 동반해 중간에서 만나 회포를 푼 '반보기' 등 그 시대 사람들의 생활사를 보여준다.

또 본래 '말 머리를 나란히 하다'라는 뜻으로 과거 급제자들이 말을 타고 행진하는 것을 지칭했던 제마수(齊馬首)가 가벼운 잘못을 털어내기 위해 한턱내는 벌칙으로 바뀐 과정, 과거 시험을 앞둔 지방 유생들이 서당이나 향교에서 합숙하며 집중 모의학습을 하는 '거접', 권당 제작비가 요즘 돈으로 수천만 원이나 되는 조상 문집 출간 비용을 마련하기 위해 전도양양한 관리가 지방관을 자청한 이야기 등도 흥미롭다.

376쪽. 1만8천원.
선비들의 일기에서 길어 올린 조선의 일상사
/연합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