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공의 뱃노래 가물거리면~' 특유의 恨 서린 창법…나라 잃은 한민족 위로
오래 전해 온 곡은 오래 이어져간다. 이런 노래가 애창곡이다. 이런 곡조는 선율과 멜로디가 통속적이고 대중성을 띠는 것이 특징인데, 1935년 불린 ‘목포의 눈물’은 당시 시대상황과 민족감성을 가장 잘 아우른 절창이다.

사공의 뱃노래 가물거리면/ 삼학도 파도 깊이 스며드는데/ 부두의 새~악씨 아롱 젖은 옷자락/ 이별의 눈물이냐 목포의 설움// 삼백년 원한 품은 노적봉 밑에/ 임 자취 완연하다 애달픈 정조/ 유달산 바람도 영산강을 안으니/ 임 그려 우는 마음 목포의 노래(가사 1, 2절)

이 노래는 1934년 전국 도시 애향가사모집에서 함흥 출신으로 일본 유학 후 목포에서 기자생활을 하고 있던 문일석이 ‘목포의 사랑’이란 제목으로 출품해 1등한 가사다. 여기에 손목인의 ‘갈매기 우는 항구’ 멜로디를 입히고, 일제 조선총독부의 음반레코드단속규칙 검열에 통과하지 못한 제목 ‘목포의 사랑’을 ‘목포의 눈물’로 고쳐서 이난영이 불렀다. 당시는 일제의 식민통치가 25년째 이어지던 시기였다. 무단통치와 문화통치를 거쳐 민족문화를 말살하고 황국신민화를 꾀하던 시절로 이난영은 18세, 작사가 문일석은 20세, 작곡가 손목인은 22세였다.

‘목포의 눈물’ 2절 노랫말은 임진왜란 당시 명량대첩의 주인공 이순신 장군과 궤를 같이한다. 노랫말에 ‘삼백년 원한 품은~’ 구절은 임진왜란이 끝난 336년이 지나서 다시 나라를 빼앗긴 식민치하의 한을 읊은 것. ‘임 자취’는 이순신 장군이 1597년 9월 16일 명량대첩(13척 대 133척의 승리)으로 왜적을 물리친 뒤 목포 앞바다 고하도(보화도)에 진을 치고 노적봉에서 지휘하던 흔적을 말한다. 그해 10월 29일부터 1598년 2월 17일 고금도로 이진(移陣)할 때까지 107일 동안 8000여 조선수군과 1000여 가구의 피란민이 이곳에 주둔했었다. 그 당시 삼도수군통제영 본부다.

본명 이옥례, 이난영은 1916년 목포 양동에서 태어나 목포공립보통학교를 4학년까지 다니다가 엄마와 함께 제주도로 이주했다. 이때 극장을 경영하는 주인집 아이를 돌보면서 흥얼거리던 노래 실력을 높게 평가한 주인이 그녀를 막간가수로 활동하게 해줬으며, 이때가 1932년 열여섯 살 때였다. 그녀는 특유의 비음과 흐느끼는 창법으로 남도 판소리 가락 같은 한 스민 노래를 불렀다. 1935년 ‘목포의 눈물’로 엘레지의 여왕이 된 후 1936년 악단장 김해송과 결혼했다. 둘은 4남 3녀를 뒀는데 김시스터즈(숙자, 애자, 이봉룡의 딸 민자)와 김보이스가 그들이다.

1968년부터 목포에서는 난영가요제를 열고 있으며, 2006년 4월 11일 목포항 삼학도에 난영공원이 조성됐다. 이난영 타계일(1965년 4월 11일)과 연계한 개장이었다. 이때 이난영의 유해는 파주에서 41년 만에 고향 품으로 돌아와 수목장으로 안장됐다.

600여 평의 난영공원에는 ‘목포의 눈물’ ‘목포는 항구다’ 노래비가 있고, 난영나무가 자라고 있다. 목포는 삼백(三白:쌀·목화·소금)의 도시로, 일제 식민지 때는 이 삼백을 강제 수탈당했다. 또 목포는 뱃고동 소리와 함께 섬마을을 오간 헐벗고 굶주린 서민들의 눈물 어린 이별과 상봉의 장소였다. 목포항은 1897년에 개장한 상항(商港)이다.

유차영 < 한국콜마 전무이사·여주아카데미 운영원장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