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한규 명예교수 '동아시아의 창화 외교' 출간
조선과 명나라 사신은 詩로 외교전을 벌였다

국가지정문화재 보물 중에 '봉사조선창화시권'(奉使朝鮮倡和詩卷)이라는 유물이 있다.

명나라 사신 예겸(倪謙)이 1450년 정인지·신숙주·성삼문과 나눈 시문을 엮었다.

창화(倡和)는 한 사람이 한시를 읊으면 상대가 한시로 응수하는 것을 뜻한다.

예컨대 예겸이 "새벽에 성균관 가서 묘당을 배알하니, 큰 행단(杏壇)이 드넓고 밝은 벽산(碧山)은 드높다"고 하자 정인지는 이를 차운(次韻·남의 시운을 써서 시를 지음)해 "성인 배알하고 돌아와서 강당에 따라 드니, 이런저런 담소함이 봄볕처럼 따뜻하다"고 답했다.

김한규 서강대 명예교수는 신간 '동아시아의 창화 외교'에서 창화를 오늘날 '비보이 배틀'에 비유한다.

완력으로 상대를 제압하는 대신 예능을 마음껏 과시해 역량을 뽐내고 탄복을 끌어내는 것이 비보이 대결과 흡사하다는 것이다.

저자는 책에서 창화 외교 역사를 춘추시대부터 추적하고, 한국과 중국은 물론 일본·유구(오키나와)·월남(베트남)까지 아우르며 동아시아에서 창화 외교가 어떻게 이뤄졌는지 분석한다.

오늘날에는 시가 대개 문학적 재능을 표출하고 우의를 다지는 예술로 인식되지만, 당시에는 이해관계가 충돌하는 외교에 활용됐다.

특히 명과 조선은 창화 외교를 치열하게 했다.

저자는 양국이 투시(鬪詩)와 쟁시(爭詩)를 수단으로 문전(文戰)을 벌였다고 본다.

그는 "시는 정과 뜻을 소통하는 좋은 매개인 동시에 전쟁에서 이길 수 있게 하는 위력적인 무기이기도 했다"며 "조선 문인이 시전(詩戰)을 전개한 배경에는 자국 문화에 대한 자의식과 자신감이 깔려 있었다"고 강조한다.

이어 "한시 창화의 중요한 외교상 의의는 서로 동문임을 확인하고 동류의식을 통해 전통적 책봉·조공 관계를 안정시키는 정치적 효과를 기대할 수 있다는 데서 발견할 수 있다"며 "문학 교류를 주요 내용으로 하는 창화 외교가 외교적 모순을 해결하는 유효한 경로가 됐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저자는 창화 외교의 분명한 한계도 지적한다.

명나라 사신이 조선에서 시를 주고받기는 했지만, 조선 문인이 명에서 창화 외교를 펼친 사례는 거의 확인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에 대해 저자는 "명과 조선이 '독립적이나 불평등한' 종번(宗藩) 관계로 규정된 것과 무관하지 않다"며 "창화 외교란 중국이 선창하고 다른 나라가 화답하는 '중국적 세계 질서' 안에서 작동한 외교 양식이었다"고 말한다.

그러면서 그는 조선과 일본 간에는 창화 외교가 사실상 이뤄지지 않았다고 본다.

조선통신사가 일본 문사들과 시를 교환하기는 했지만, 현안 해결보다는 우호를 돈독히 하는 수준에 그쳤다고 분석한다.

결론적으로 저자는 동아시아 국제 질서에서 물리적 힘이 아니라 문화적 요소가 핵심이었으며, 창화가 이를 입증하는 예라고 주장한다.

즉 겉보기에는 중국과 주변국 사이에 수직적 관계만 존재했지만, 실제로는 창화 외교 등을 통해 어느 정도 융통성 있는 관계가 형성됐다고 설명한다.

이러한 시각은 동아시아 외교에서 조공과 책봉을 일방적이지 않은 호혜적(互惠的) 관계로 간주한 저자의 스승 고(故) 전해종 서강대 명예교수 견해와 맥을 같이하는 것으로 보인다.

소나무. 608쪽. 4만원.
조선과 명나라 사신은 詩로 외교전을 벌였다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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