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가 이치은 첫 산문집 '천상에 있는 친절한 지식의 중심지'

책을 읽다 보면 머릿속에서 '딸칵'하고 나는 소리를 들을 때가 있다.

작가가 자신의 의도를 지루하지 않게 혹은 더 극적으로 전달하고자 정교하게 짜 넣은 미로를 이리저리 헤매다, 문득 그 기획의 전모를 엿본 느낌이 들 때다.

개성 있는 전위적 작품세계를 구축한 소설가 이치은은 이처럼 "글을 쓴 작가의 마음의 얼개"를 엿보게 하는 결정적 단서가 되는 책 속의 짧은 문장들을 "부스러기"라 부른다.

그의 첫 산문집 '천상에 있는 친절한 지식의 중심지'(알렙 펴냄)는 저자가 최근 10년간 읽은 수많은 책 속에서 주워모은 이런 부스러기들에 대한 책이다.

여기에 담긴 70편 짧은 에세이들에선 책 읽기가 무엇과도 비교하기 힘든 커다란 쾌락이라고 고백하는 저자의 책에 대한 집착과 욕망, 독서광으로서의 강한 자의식이 배어 나온다.

프랑스 소설가 파스칼 키냐르 책에서 발견했다는 부스러기 "왕이 되기 위해 그에게 부족한 것은 오직 왕국뿐이다" 밑엔 이런 평을 달아놨다.

"당신은 왕이 되길 바라는가? 그러면 왕국은 있는가? 내겐 내가 읽은 책이라는 영토가 있고, 내가 쓴 글이라는 신하가 있고, 내가 읽을 책이라는 미개척지가, 내가 쓸 글이라는 미래의 신민들이 있다.

그걸로 충분하다.

타인이 필요하다면……." (p.303)
책들에서 주운 부스러기들에 대한 책

책은 무엇이고 독서의 의미는 무얼까.

저자는 프란츠 카프카가 소싯적 친구에게 보낸 편지에서 찾아낸 문장으로 답을 대신한다.

"책이란 우리 내면에 존재하는 얼어붙은 바다를 깨는 도끼여야 해."
"많은 책들은 자신의 성 안에 있는 어떤 낯선 방들에 들어가는 열쇠 같은 역할을 하네."(p.p. 19~20)
책 제목이자 첫 번째 에세이 표제이기도 한 '천상에 있는 친절한 지식의 중심지'는 저자가 애정을 숨기지 않는 남미 문학의 거장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 저작에 등장하는 중국백과사전 이름이다.

이 사전엔 미셸 푸코와 움베르토 에코가 인용에 재인용을 해 더 유명해진, 말과 사물에 관한 새로운 통찰을 제공하는 동물의 분류가 수록됐다.

그 분류는 이렇다.

a. 황제에 예속된 동물들 b. 박제된 동물들 c. 훈련된 동물들 d. 돼지들 e. 인어들 f. 전설의 동물들 g. 떠돌이 개들 h. 이 분류 항목에 포함된 동물들 i. 미친 듯이 날뛰는 동물들 j. 헤아릴 수 없는 동물들 k. 낙타털로 만든 섬세한 붓으로 그려진 동물들 l. 그 밖의 동물들 m. 방금 항아리를 깨뜨린 동물들 n. 멀리서 보면 파리로 보이는 동물들 (p.15)
도스토옙스키 '죄와 벌'에서 주웠다는 문장도 의미심장하다.

"권력이란 다만 그것을 잡기 위해서 몸을 굽힐 수 있는 사람에게만 주어지는 것이다.

" (p.301)
저자는 1998년 첫 소설 '권태로운 자들, 소파 씨네 아파트에 모이다'로 '오늘의 작가상'을 수상했으며, '유대리는 어디에서, 어디로 사라졌는가?'(2003년), '비밀 경기자'(2009년), '노예 틈입자 파괴자'(2014년), '키브라, 기억의 원점'(2015년), '보르헤스에 대한 알려지지 않은 논쟁'(2018년), '마루가 꺼진 은신처'(2019년)를 발표했다.

320쪽. 1만6천500원.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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