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호한 언어·낯선 문장…일상 어법 허문 詩的 사유
‘검정에 고인 열에 손을 대본다//땅의 깊은 온기,/흰검정’.

2014년 등단한 이영재 시인(사진)이 첫 시집 《나는 되어가는 기분이다》(창비)에서 제일 앞에 내놓은 ‘흰검정’이란 시의 한 구절이다. 끝에 등장하는 ‘흰검정’이란 단어가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쉽게 알 수 없다. 어떤 사물이 희면서 동시에 검을 수는 없기 때문이다. 논리적으로 보면 모순적인 게 공존하는 것은 허용되지 않는다. 논리적인 세계가 아닌, 실제 세계에서는 어떤 사물도 한 특성만 지니고 있지 않다는 점을 시인은 ‘흰검정’이란 단어를 만들어 보여준다.

시집 속 시는 대부분 쉽게 이해되지 않는다. ‘흰검정’처럼 어떤 결여와 넘침이 동시에 시에 기록돼 있어서다. 시인은 관습적인 의미 체계를 뛰어넘는 모호한 언어와 일상에서의 어법을 허무는 낯선 문장들로 대부분의 시를 버무려놨다. 읽는 이가 길을 잃게 되는 이유다. ‘공이 던져지고//생각되되/생각될 것이다’(생각되되 생각될 것)나 ‘생각된 생각을 생각하는 과정이다’(검열)는 극단적 피동형 서술을 통해 존재의 능동성에 대한 회의를 드러낸 대목이다. 이 시인은 ‘시인의 말’을 통해 “타당해 보이는 핑계를 대면서 나는 된 것, 되는 것, 될 것 따위를 믿지 않았다”면서 “시에 의해 구축된 내가 시를 구축하는 오류를 범하고 있다. 시는 충분히 옳고 충분히 그르고 충분히 충분치 않다”며 시집 속에 녹여낸 사유의 근원에 대해 밝혔다.

모호한 언어·낯선 문장…일상 어법 허문 詩的 사유
이 시인은 59편의 시 가운데 가장 애착을 느낀 시로 ‘슬럼’을 꼽았다. 시집 제목이기도 한 ‘되어가는 기분이다’란 시구가 들어간 시다. 그는 이 시에 대해 “가장 연약했던 시기의 누군가를 그려보고자 했다”며 “옳지도 그르지도 않고, 되지 않을 걸 알면서도 되어가는 것 같은 기분에 오래 놓여 있길 바란다”고 했다.

시집은 언어적 한계와 가능성뿐만 아니라 실존에 대한 인식으로까지 이어진다. ‘누군가 기쁘고/누군가 슬펐다//누군가 행복하다면 누군가 불행해야 해서’(청사진)라는 시구를 통해서는 삶의 고통과 슬픔을 절실한 언어로 담아냈다. 이 시인은 “옳다는 논리에 갇히지 않으려고, 쉽게 판단하거나 취하지 않으려고 애썼다”고 말했다. 생명은 쉽게 상처받고 방어기제를 통해 자기 치유로 들어서는데 그 치유의 기본엔 ‘괜찮다’ ‘옳다’란 논리가 숨어 있다는 게 그의 생각이다. 그는 “상처에서 비롯된 옳음은 타인의 그름이라는 공격성으로 변하기 쉽다”며 “시 각 부의 부제로 쓴 ‘상쇄’ ‘기형’ ‘상대성’ ‘투명’ 등은 그런 나 자신에 대한 검열의 언어”라고 말했다.

시집을 해제한 전병준 문학평론가는 “다른 것 없이 순수한 상태에 머물러 있거나 타자와의 만남을 거부해선 새로운 관계나 생성이 가능하지 않다”며 “이영재의 시들은 모순되고 대립되는 것들, 서로 다른 것들이 겹치고 얽힐 때만 비로소 새로운 게 만들어진다는 것을 보여준다”고 말했다.

은정진 기자 silver@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