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명철의 한국, 한국인 재발견] 비파형 동검·청동거울…원조선 합금·주조 기술 당대 최고였다
한국은 많은 나라가 선망하는 국가다. ‘한류’는 선진국에서도 인기몰이 중이다. 50년 만에 세계 최빈국을 벗어나 산업화와 부국강병에 성공했기 때문이다. 우리 역사에서도 산업이 발전하고, 뛰어난 기술력을 갖춘 나라들이 있었다. 하지만 ‘고대 산업’에 대한 오해, 자기 정체성에 대한 불신과 저평가, 역사학자들의 편협함 때문에 이를 잘 알지 못한다.

[윤명철의 한국, 한국인 재발견] 비파형 동검·청동거울…원조선 합금·주조 기술 당대 최고였다
원조선은 어떤 종류의 산업이 발달했으며, 기술력은 어느 수준이었을까? 농업과 어업, 임업, 목축업 등 1차 산업과 성을 쌓고 도로를 닦고 거대한 고분 및 고인돌을 만드는 토목업, 조선업 등은 국가의 기간산업이다. 그런데 기술력의 정수, 응용 범위의 확장, 기타 산업에 대한 파급효과 등을 고려하면 화공(化工)을 이용한 요업(세라믹)과 금속을 이용한 군수산업, 제사산업이 핵심이었다.

원조선 전기는 청동기 문화가 발달한 시기였다. 중국 랴오닝성 다롄(大連) 근처의 강상무덤(崗上墓)과 루상무덤(樓上墓), 요하(遼河) 동쪽 지방인 요동의 정가와자 무덤들(선양 정가와자에 있는 유적), 요서의 십이대영자 무덤 등에서는 청동 단검, 청동 도끼, 청동 끌, 청동 화살촉, 수레 부속품, 마구류, 단추 등 각종 청동 제품이 무더기로 발견됐다. 그 가운데 원조선의 금속산업과 기술력을 알려주는 유물은 상징성이 강하고, 기능성이 높으며, 난도가 높은 기술력을 필요로 하는 비파형 동검(고조선식 동검 또는 요녕식 동검)과 청동거울(잔무늬 거울, 거친무늬 거울)이다.

고대사회에서 칼은 무기로 기능했고 정치력을 의미했으며, 상징성도 강했다. 특히 비파형 동검은 특별한 형태와 표방한 논리로 인해 더욱 중요했다. 기원전 11세기를 전후한 시기부터 제작됐는데, 서쪽은 요하를 지나 베이징 근처와 산둥지역, 북쪽은 네이멍구 남부지역과 북만주, 동쪽은 연해주 일대, 남쪽은 한반도 전 지역, 바다 건너 일본 규슈 지방 등에서 200개 이상이 발견됐다. 하급 무사의 무덤에서도 나온 걸 보면 대량으로 생산됐을 것이다.

살상력 뛰어난 비파형 동검

[윤명철의 한국, 한국인 재발견] 비파형 동검·청동거울…원조선 합금·주조 기술 당대 최고였다
비파 모양의 신비한 형태와 유려한 선, 맑고 환한 색이 어우러진 독특한 미학 때문에 제사용이라는 주장이 많았다. 그런데 직접 제작해 실험한 결과 살상력이 뛰어나다는 사실을 입증할 수 있었다. 손가락을 날에 대는 찰나 베일 듯한 느낌이 들었다. 길이가 30~35㎝ 정도인데, 사상성과 실용성을 고려해 검신과 검자루 및 검자루 맞추개를 따로 만든 ‘3단 조립식 검’이다. 따라서 중국이나 북방 유목종족의 통짜 주조품과 달리 뛰어나고 정교한 기술력이 있어야 한다.

원조선 후기에 사용된 세형 동검(한국식 동검, 좁은 놋단검)은 길이가 보통 30㎝ 정도인데, 형태가 다소 투박하고 손잡이 부분이 상대적으로 짧다. 미(美)의식이 부족한 것은 이미 철기시대였으므로 기능성에 비중을 둔 탓이지 기술력이 퇴보했기 때문은 아니다. 오히려 대량 생산된 세형 동검들은 날이 예리하고, 반들반들할 정도로 우수했다. 한반도 전역에서 놋창·놋과·청동제 고리 등을 제작했으며, 일부는 일본 열도로 수출하거나 기술 이전을 통해 현지 제작했다.

神物인 거울은 청동으로 제작

[윤명철의 한국, 한국인 재발견] 비파형 동검·청동거울…원조선 합금·주조 기술 당대 최고였다
원조선은 후기에 이르러 철기를 사용했음에도 불구하고, 거울만큼은 청동으로 제작해 사용했다. 청동거울은 90여 개가 한반도 전역과 만주 일대, 특히 요동과 요서 지방 그리고 소량이지만 일본 열도에서도 발견됐는데, 이 지역들은 원조선의 영토, 생활권 또는 무역권의 범주에 해당한다.

고대사회에서 거울은 종교적으로 중요한 신물(神物)이며, 정치적으로도 상징성이 컸다. 원조선의 청동거울은 기원전 5~4세기에 제작됐는데, 단군신화의 천부인(天符印) 3개 가운데 으뜸으로서 고도의 미와 의미, 심오한 ‘내적 논리(사상)’가 반영돼야 했다. 최고의 지식과 우수한 기술력을 동원할 수밖에 없었다. 완벽한 ‘원형’이고, 직경이 7~12㎝다. 전북 완주에서 발견된 동경은 지름이 14.6㎝이며, 무게는 447g이다. 한쪽 면에 끈을 맬 수 있는 2개 또는 3개의 꼭지가 있으며, 무늬선의 곱고 거친 정도에 따라서 ‘잔무늬 거울(다뉴세문경)’과 ‘거친무늬 거울(다뉴조문경)’로 나눈다.

잔무늬 거울은 실낱처럼 가는 수천 개의 선, 하늘을 상징하는 동심원, 복잡하고 정교한 기하학 무늬와 톱날 무늬로 구성됐다. 신비함과 합리성, 현란한 미의식과 기능성이 조화를 이룬 결정체였다. 반면 거친무늬 거울은 번개무늬 별무늬 방사상무늬 동심원 등이 조합돼 무늬선이 거칠며 외모 또한 투박했다. 이것은 기술력의 퇴보가 아니라 문화의 성격이 변모하고, 실용성이 높아진 시대 상황 때문이다.

청동거울 대량 제작이 원조선의 전반적인 산업화에 기여한 정도는 측량할 수 없지만, 금속공학과 제련술 등을 크게 발전시킨 것은 분명하다. 그래서 청동 방울들과 장식품 등 다양한 금속제품이 제작됐고, 관련 산업이 발달했다(윤명철 <고조선 문명권과 해륙활동>).

한참 앞선 합금·주조 기술

그렇다면 원조선인들의 기술력은 어느 수준이었을까? 제작 재료인 동 주석 아연 운석 등 지하자원을 채굴하는 광업도 중요하지만, 제작하는 청동 합금기술과 청동 주조기술은 더욱 중요하다.

원조선의 청동 제품들은 구리 주석 연(鉛) 아연 등을 섞은 ‘연아연청동’이 대부분이다. 그런데 청동거울을 만들 때는 무기 제작 때보다 구리에다 주석을 많이 넣고, 아연과 연의 비율을 올렸다. 그래야만 주조성과 반사효과를 높이고, 색깔도 변화시켜 장식효과를 극대화할 수 있기 때문이다. 후기에 만들어진 세형 동검 등은 주석의 비율이 대부분 17~19% 정도를 유지했다. 그들은 강도를 최고로 높일 수 있는 현대의 화학공식을 알았던 것 같다. 또 불의 온도를 높이는 데 효율적인 청동야금로를 제작하고, 풍구(풀무)를 만들어 이용했다.

기원전 7세기의 강상무덤에서는 직경이 0.25㎜밖에 안 되는 가는 구리실을 뽑아서 만든 그물 장식품이 발견됐다. 기원전 6~5세기의 잔무늬 거울은 국보 141호다. 직경 21㎝에 평행선 1만3000개와 동심원을 새겼는데, 선과 선 사이의 간격이 0.3㎜에 불과하다. 현대에도 재현이 어려운, 당시로서는 불가능한 최고의 기술력이다. 동검·도끼날·끌·송곳·장식품 등을 만드는 돌로 된 거푸집(용범)이 만주와 한반도, 일본열도의 여러 곳에서 발견됐다.

그런데 잔무늬 거울은 모래 거푸집도 사용했지만, 기하학적인 무늬를 정확하게 제도하고, 정교하게 새겨야 하므로 밀랍 용범을 썼을 것이다. 밀랍 용범은 한 번밖에 사용할 수 없는 특성상 보존될 수 없었다.

국가 간 갈등 고조돼 군수산업 발달

원조선은 후기에 접어들어 철기시대를 본격적으로 열었다. 함북 무산의 범의구석에서는 쇠창, 질 좋은 선철제 도끼가 출토됐는데, 이미 기원전 7세기에 철 주물법을 사용한 유물들이 발견됐다. 이어 백색주철(선철)을 생산했는데, 제철로의 온도를 1200도 이상으로 높일 수 있도록 제철로를 개선하고, 디딜풍구 같은 송풍장치를 만들어 탄소함유량이 2.0~4.2%인 아공정백색주철을 생산했다.

기원전 4~3세기에 들어오면 국가 간 갈등이 치열했던 시대를 반영해 군수산업이 발달했는데, 출토된 강철 제품의 탄소함유량은 0.62~1.43% 사이였다. 이렇게 개선된 강철 제품들로 쇠도끼·쇠칼·쇠창·쇠장검·쇠갑옷 등을 주조했다. 심지어는 철로 격발장치를 만든 쇠뇌까지 주조했고, 낫 등의 농기구까지 제작했다(북한, <조선광업사> <조선수공업사>).

기술력·장인집단이 국력의 원동력

원조선은 제강법과 제련업을 개발했고, 화학공업이 발달해 금속산업이 번창했다. 그리고 무기·농기구·어구·공구·기마제품 등의 기능이 향상됐으며, 신기술을 적용한 관련 산업이 활기를 띠었다. 모피 가공업, 구슬 가공업, 건축과 조선업, 그리고 금·은 제련과 도금업 등은 최고의 기술력을 갖췄으며, 부가가치가 높은 산업이었다.

원조선을 천수백 년 동안 발전시키고, 마지막 단계에 한나라와 1년 동안 해륙 양면전을 벌일 수 있도록 한 원동력은 첨단산업과 기술력 그리고 이를 뒷받침한 장인 집단이었다. 하지만 지금처럼 정치가 산업을 압도하고, 교조적인 지식인들이 주역인 ‘조선’은 자의식을 상실한 채 부국을 이룬 원조선의 산업과 장인들을 지워버리고, 하릴없이 약소국으로 전락했다.

윤명철 < 동국대 명예교수·한국해양정책학회 부회장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