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이 있는 아침] 김환기 '항아리와 여인들'
‘내 예술은 하나 변하지가 않았소. 여전히 항아리를 그리고 있는데 이러다간 종생 항아리 귀신이 될 것 같소.’

한국 현대미술의 선구자 김환기(1913~1974)가 친구에게 쓴 편지의 한 구절이다. 김환기는 생전에 “내가 조형미에 눈뜬 것은 도자기에서 비롯됐다”고 할 정도로 조선시대 백자 달항아리에 심취했다. 유백색 대호(大壺)와 청백색 달항아리의 군더더기 없는 절제미에 반해 수집에도 열정적이었다. 백자를 사들여 팔로 안아보고, 때로는 마당의 육모초석 위에 올려놓고 바라보며 예술적 영감을 얻었다.

6·25전쟁이 한창이던 1951년 부산 피란 시절 제작한 ‘항아리와 여인들’도 백자를 화가의 시각으로 캔버스에 푸짐하게 올려놓은 수작이다. 화면은 수평으로 하늘과 바다, 육지로 삼등분돼 있다. 푸른 바다에는 배가 떠 있고, 해변에는 피란민들 숙소인 천막이 조그맣게 묘사돼 있다. 반라(半裸)의 여성들은 저마다 당당한 모습으로 전쟁의 아픔 대신 달항아리를 소중히 이거나 보듬고 있다. 전쟁의 암울함을 외면하기보다는 차라리 달항아리에 평화와 행복을 담으려는 간절한 염원으로 읽힌다.

무엇보다 사람들의 동작의 대비가 흥미롭다. 오른쪽 네 명의 여인은 무언가를 성취한 듯한 표정으로 걷고 있고, 왼쪽 어깨동무를 한 두 여인은 기다리는 듯한 표정을 하고 있다. 저 멀리 수평선을 기표로 여인들의 행위가 마치 절망에서 피어난 희망처럼 변주된다.

김경갑 기자 kkk10@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