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의 향기
순백의 눈으로 뒤덮힌 한라산 등산로

순백의 눈으로 뒤덮힌 한라산 등산로

제주는 사계절이 모두 빛나는 곳이다. 어느 계절이 더 좋냐는 질문은 실상 어리석은 것이다. 그래도 조금 더 마음에 담는 계절이 있다면 단연 겨울이다. 순백의 눈이 내린 제주는 어린아이의 낯빛처럼 청순하고 환하다. 안타깝게도 올해는 날이 푸근해서인지 눈을 보기 어렵다. 그나마 순백의 제주를 볼 수 있는 곳은 단연 한라산이다. 한라산 등산로 중 으뜸으로 꼽힌다는 영실코스를 따라 천천히 제주의 속살로 파고들었다. 구석구석 눈이 보이고 새초롬한 나무들이 고개를 숙였다. 그렇게 제주의 겨울은 시작되고 있었다.

취재 협조 : 제주관광공사

새하얀 한라산 영실 걸어서 오르다

제주의 겨울 꽃 ‘동백’

제주의 겨울 꽃 ‘동백’

한라산을 오르는 등산 코스는 여러 곳이 있지만 개인적으로는 영실코스가 가장 매력적이다. 한라산 위에 있는 윗세오름까지 오르는 코스 중 하나인 영실코스는 3.7㎞, 왕복 7.4㎞ 정도이니 한나절이면 무리없이 다녀올 수 있다. 어떤 이는 영실코스를 진달래밭, 구상나무 숲이 보이는 봄철에 가는 것이 좋다고 하지만 겨울에 흰 눈을 밝으며 걷는 등반길도 제법 매력적이다. 다만 겨울철에 등반하려면 아이젠을 꼭 차고 입산 시간을 철저하게 지켜야 안전한 산행을 할 수 있다. 영실의 매력은 한라산의 장관을 한눈에 감상할 수 있다는 것이다. 눈 내리는 겨울날이면 눈보라 속에 한라산의 골격이 보였다 감춰졌다 한다. 길을 따라가다 보면 오백장군봉이 보인다. 오백장군봉은 설문대할망의 설전설이 깃든 곳이다. 한라산을 만든 설문대할망에게 자식이 500명 있었는데 흉년이 들어 먹을 것이 없자 아들들을 위해 큰 솥에 죽을 끓이다 그만 솥에 빠져 죽고 말았다. 아들들은 집안에 있는 죽을 보고 맛있게 먹다 사람 뼈를 발견하고 그것이 설문대할망이라는 것을 깨닫고 스스로 목숨을 끊어 오백장군바위가 됐다고 한다. 한라산에 붉게 피어나는 진달래와 철쭉은 아들들이 흘린 눈물이라고 한다.

제철 생선인 옥돔과 무를 함께 끓인 옥돔뭇국

제철 생선인 옥돔과 무를 함께 끓인 옥돔뭇국

다소 황망한 전설이 깃든 오백장군바위는 오백나한봉이라고 불리기도 하는데 이는 불교적인 색채가 덧입혀져서일 것이다. 남성적인 기암괴석이 가득한 오백장군봉을 멀리하고 산허리를 따라 길을 돌면 문득 바다가 펼쳐진다. 맑은 날이면 서귀포의 모슬포와 마라도까지 한눈에 내려다보인다. 구상나무 자생지다. 크리스마스트리로도 많이 쓰이는 나무답게 겨울에도 싱싱한 모습 그대로다. 눈을 한 움큼 머리에 얹고 마치 한라산을 수호하듯이 가지를 쫙 펴고 우람하게 서 있다. 구상나무 숲길을 빠져나오면 윗세오름이다. 영실코스는 길을 따라 데크가 잘 조성돼 있어 몇 개의 깔딱고개만 넘으면 그리 어렵지 않게 오를 수 있다.

새해 기원은 송당리 성불오름에서

제주의 대표 겨울 보양식 꿩 샤부샤부

제주의 대표 겨울 보양식 꿩 샤부샤부

한라산 등반이 무리다 싶으면 구좌읍 송당리에 있는 성불오름에서 경자년 새해 소망을 기원해보자. 성불오름이라는 독특한 이름이 유래된 이유는 정확하지 않다. 고려시대 이곳에 성불암이라는 암자가 있었다고도 하고, 성불천이라는 샘물이 있었다는 이야기도 있다. 이름 때문인지 성불오름의 바위 모습이 마치 기도하는 모습을 닮았다. 오름은 번영로나 인근 관광기념품 판매소 근처에 등반로가 있다. 오름입구에서 안내도를 확인한 뒤 등반하면 된다. 난도가 제법 있는 편이다. 입구에서 정상까지 40분 정도 걸린다. 오를 때는 모르는데 막상 오르면 마치 다른 세상에 들어간 것 같은 기이한 느낌을 받는다. 무엇보다 성불오름은 흐린날 안개가 내려앉을 때의 풍경이 기막히다. 마치 신선의 세계로 들어가는 듯하다. 맑은 날이면 정상에서 따라비 오름과 한라산, 보름왓과 영주산, 멀리 성산일출봉까지 전망할 수 있다.

붉은 동백꽃 겨울은 깊어가고

등산보다 동백을 보고 싶다면 제주 곳곳에 있는 동백꽃 자생지를 찾아가는 것이 좋다. 무채색의 계절에 생기를 불어넣는 겨울 꽃 동백. 사랑스러운 애기동백과 짙붉은 토종동백이 개화시기를 달리하며 제주 겨울을 밝힌다. 하지만 그 아름다움 너머 아련한 사연이 있으니 툭, 툭, 송이째 떨어지는 토종동백은 4·3의 희생을 닮았다고 한다. 남원읍 의귀마을 4·3길, 동백나무 구간에서 그날의 아픈 기억을 더듬으며 꽃의 생기로 치유의 힘을 얻을 수 있다. 이웃한 신흥리는 300년 역사의 동백마을로 수㎞의 동백가로수가 인상적이다. 마을 방문자센터(서귀포시 남원읍 한신로 531번길 22의 1)에서는 식용동백기름을 활용한 식사체험, 동백오일 비누체험도 할 수 있다(사전 문의 및 예약 필수). 제주의 동백은 도내 곳곳 미로에도 피어난다. 길을 찾아가는 재미에 동백의 매력이 더해지면 미로 속에서 길을 잃고도 초록 잎 사이 붉은 꽃을 찾아내는 기쁨에 걱정은 사라지고 없을 것. 바로 지금이 동백꽃 필 무렵이요, 우리 인생도 피어날 무렵이다.

제주=최병일 여행·레저전문기자 skycbi@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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