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조선 드라마 '다모' 결말이 어떻게 되는가? 내래 마지막회를 못 봤어."영화 '백두산' 속 북한 무력부 소속 일급 자원 '리준평'(이병헌)이 백두산 폭발을 막기 위해 비밀 작전에 투입된 특전사 조인창(하정우)에게 한 말이다. 리준평은 "수용소 있는 동안 궁금해 죽는 줄 알았다"며 한국 드라마 '다모'의 결말을 묻는다. "남조선 드라마를 보믄, 열에 아홉은 기억상실증 환잡니다. 자본주의에서는 굉장히 흔한 병이디요.""그거이 미제 콜라 먹어서 생기는 병입니까?" tvN 드라마 '사랑의 불시착'에서는 한국 드라마 '천국의 계단'을 보다 DMZ에 불시착한 윤세리(손예진)를 놓치기도 한다. 또 북한 군인들은 윤세리를 앞에 두고 이같은 대화를 나눈다. 순박한 말투와 천진난만함에 웃음이 터진다. 최근 북한을 소재로 한 작품들이 스크린과 브라운관에 등장했다. '사랑의 불시착'이 방영된 후 '살 까기', '후라이 까기' 등 북한 말이 포털 사이트 실시간 검색어에 오르기도 했다. 북한은 한국 영화의 단골 소재다. 2017년에는 현빈, 유해진 주연의 코미디 영화 '공조', 북한 정예요원과 남한 외교안보수석의 분투를 다룬 '강철비'가 차례로 개봉했다. 2018년엔 핵무기 관련 대북공작원과 북 경제 고위간부의 갈등을 다룬 영화 '공작'이 스크린에 올랐다. 업계 관계자에 따르면 북한 소재는 화제성을 높이는데 큰 도움이 된다고. 남과 북의 대치상황을 통해 극적인 갈등 상황을 담아내고 휴머니즘, 로맨스 등 장르 변주가 가능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리스크도 있다. '공작'을 연출한 윤종빈 감독은 인터뷰에서 "촬영 중 북한이 선제 타격을 하니 마니 난리가 났었다. 남북관계가 일촉즉발이 됐을 때 영화가 의미있을까, 화해 무드에 이 영화가 의미있을까 판단을 못 하겠더라"라고 털어놓기도 했다. 급변하는 남북, 그리고 북미 관계에서 타이밍을 재며 정세에 촉각을 곤두세워야 했다는 것이다. 한 제작사 관계자는 "북한에 대한 관객의 시선은 다양하다. 콘텐츠를 만들며 현실과 상상력의 경계를 어디까지 해야할지 중요하다"면서 "조금만 힘을 줬다가는 '북뽕'(북한에 취했다)라는 지적을 받는다"라고 귀띔했다. 실제로 대중에 선보인 작품들은 '북한 미화' 논란에 휩싸이기도 했다. 냉탕과 온탕을 오가는 시점에 남북 브로맨스와 로맨스를 그린 작품들이 눈살을 찌푸리게 한다는 것이다. 영화 '백두산'은 백두산 화산 폭발을 막기위해 남한 요원 하정우와 북한 요원 이병헌의 고군분투기를 그린다. 결말에서 이병헌이 화산 폭발을 막는 결정적 역할을 하면서 '북한군 미화'라는 지적이 있었다. 이같은 비판과는 달리 '백두산'은 770만 관객을 모으며 올해 최고의 흥행작으로 스타트를 끊었다. 북한 소재는 안방극장에서도 소위 '먹혔다'는 평가다. '사랑의 불시착'을 보는 시청자의 마음은 복잡하다. 손예진과 로맨스를 쌓는 북한군인은 바로 현빈이기 때문이다. 그는 과거 영화 '공조'에서 북한 형사 역을 맡았다. 당시 남한 형사는 개성있는 배우 유해진이 맡았던 터라 "북한 사람을 너무 잘 생긴 배우로 한 것 아니냐"는 '웃픈' 비판도 있었다. 현빈은 '시크릿 가든' 이후 '사랑의 불시착'을 통해 '현빈앓이'라는 말을 다시 꺼내게 했다. 이 드라마에서 현빈은 과도하게 멋있고 또 귀엽다는 평가를 받는다. 오토바이로 손예진을 쫓으며 치열한 총격전을 벌이는 엔딩 장면은 다음 회를 기다리게 만들었다. 지난주 결방했음에도 드라마 화제성 2위를 기록할 정도다. '사랑의 불시착'은 평범한 북한 마을 주민들의 이야기까지 함께 그려 시청자의 호기심을 자극하고 있다. 뉴스에서만 보던 '북한 꽃거지'는 어린 동생을 위해 음식을 훔쳐야 했던 사연이 있었고, 고급 한국 화장품과 말하는 밥가마(밥솥) 등 돈만 있으면 뭐든지 살 수 있는 주민들의 모습은 그동안 우리가 생각했던 북한과는 거리가 멀다는 비판도 있었다. 제작사 측은 "이 드라마에는 탈북인 곽문안 작가가 보조 작가로 참여해 세밀한 최종 검증 작업을 하고 있다"고 강조했다.네티즌들은 "드라마, 영화는 픽션"이라며 "영화와 현실을 분리해 볼 필요가 있다"는 반응을 보였다. 하지만 "남과 북의 첨예한 관계를 고려해 더욱 디테일한 작업이 필요할 것"이라고 지적했다. 김예랑 한경닷컴 기자 yesrang@hankyung.com기사제보 및 보도자료 newsinfo@hankyung.com
“손님 중에 ‘일반 찐빵이랑 비교해 특별히 더 맛있지 않은데 왜 비싸게 받냐’고 말하시는 분들이 있어요. 비판 같지만 저희는 그런 말을 들으면 기분이 좋아집니다. 글루텐이 거의 없어 빵을 만들기 어려운 ‘우리밀’만 사용하는데도 비슷한 맛이 난다는 건 칭찬이거든요.”전북 부안에 있는 슬지제빵소. 우리밀로 만든 찐빵과 우리팥만 쓰는 팥음료 등을 파는 이곳은 최근 변산반도 일대를 찾는 관광객의 필수 방문 코스 중 하나로 꼽힌다. 김슬지 대표(35·사진)는 “우리 농산물만 쓰겠다는 아버지의 장인정신과 부안의 자연경관이 어우러져 관광객에게 인기를 끌고 있다”고 말했다.슬지제빵소는 2017년 8월 문을 열었다. 가게의 겉모습만 봐선 귀촌한 청년이 새롭게 만든 시골의 멋진 카페 정도로 생각하기 쉽지만 김 대표와 찐빵의 인연은 더 오래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김 대표의 아버지인 김갑철 대표가 부안 읍내에 ‘슬지네안흥찐빵’이라는 상호로 찐빵집을 연 것은 19년 전인 2000년이었다. 처음엔 일반 찐빵집과 다르지 않았다. 일반적으로 사용되는 수입 밀과 수입 팥을 썼다. “2004년께 부안에 핵폐기물 처리장이 들어온다는 소식을 듣고 지역 주민들이 일제히 반대하는 모습을 보면서 아버지가 건강과 안전에 대해 다시 생각하셨다고 해요. 그러면서 먹거리도 더 건강하고 안전한 것으로 만들자는 취지에서 재료를 국산으로 바꾸기 시작했습니다.”수입 밀을 국산으로 대체하는 것은 쉽지 않았다. 가격이 비싸기도 했지만 우리밀에 글루텐 성분이 거의 없는 게 더 큰 문제였다. 글루텐 성분이 없으면 빵의 모양을 잡거나 쫄깃하게 만들기 어렵다. 김갑철 대표는 이를 해결하기 위해 직접 발효종과 발효액, 누룩 등을 사용하는 제조 방법을 개발했다. 이 방법은 특허로 등록됐다. 또 다른 핵심 재료인 팥도 국산을 썼다. 앙금을 만들 때 부안 뽕잎을 삶은 물을 활용하는 것이 특징이다.김슬지 대표는 주얼리에 관심이 많았다. 고교를 졸업한 뒤 바로 서울로 올라가 주얼리숍 등에서 일하던 그는 25세가 돼서야 대학에 진학했다. “금속공예 전공으로 대학원까지 가야겠다고 생각했었죠. 물론, 부안으로 돌아가야겠다는 생각은 전혀 하지 않았고요.”2013년 무렵 가게를 함께 꾸리던 어머니 임형자 씨가 갑상샘암에 걸려 대수술을 하고, 이를 신경 쓰던 김갑철 대표까지 피부암으로 고생하게 되자 김갑철 대표가 4남매에게 SOS를 쳤다. “당시 큰언니는 시집을 간 상태라 움직이기 어려웠고, 막내는 아직 고등학생이었어요. 셋째는 부안에서 ‘탈출’한 지 얼마 되지 않아 돌아가고 싶지 않다고 했고, 결국 남는 건 저뿐이더라고요.”김슬지 대표는 좋은 재료로 만드는 찐빵에 대한 아버지의 고집을 좀 더 많은 사람에게 알리고 싶었다. 곰소염전이 내려다보이는 자리에 지금의 슬지제빵소를 짓자고 강력 주장한 것도 같은 이유에서였다.2017년 8월 슬지제빵소가 문을 연 뒤 매출과 방문객 수가 크게 늘었다. 매출은 2017년 3억3300만원에서 2018년 8억9900만원으로, 방문객 수는 같은 기간 3만2000명에서 7만5000명으로 늘었다. 슬지제빵소 오픈 전인 2016년엔 1만 명 정도가 읍내에 있는 슬지네찐빵 매장을 찾아 1억3500만원의 매출을 올린 것에 비하면 큰 폭의 성장이다. 지난해 방문객 수는 10만 명에 달했다.사업이 확장되면서 두 동생도 합류했다. 팥과 찐빵 생산 라인은 막냇동생인 김종우 씨(25)가 담당한다. 셋째 김태양 씨(32)는 슬지제빵소의 다양한 음료 메뉴를 개발하고 온라인 마케팅을 하고 있다.슬지제빵소의 핵심 콘셉트는 ‘모든 식재료를 지역에서 조달한다’는 것이다. 일종의 로컬푸드 개념이다. 주재료인 밀은 부안군에 있는 농가들이 생산한 것을 수매해 전주에 있는 협력업체에서 가공한다.팥은 지역 농가의 생산량으로는 물량이 부족해 남원의 팥 연구회를 통해 추가로 받는다. 2018년 사용한 팥 양만 20t에 달한다. 최근엔 고추 등 밭농사를 짓는 인근 농민들에게 팥으로 작목전환을 할 수 있는지를 타진하기도 했다.부안=FARM 강진규 기자전문은 ☞ m.blog.naver.com/nong-up/221732990359
서울 중림동은 반세기 전 서울의 모습이 남아 있는 곳이다. 서울 도심의 마지막 달동네 ‘중림로5길’에는 1950년대 지어진 낡은 집이 그대로 있다.새벽마다 장이 열리는 중림 어(魚)시장은 1970년대 이전만 해도 서울에서 가장 붐비는 수산물시장으로 이름을 알렸다. 지금도 수십 년째 생선과 해산물이 길거리에 깔린다.오랫동안 과거에 머물러 있던 중림동이 크게 달라지고 있다. 2017년 봄 서울역 고가가 ‘서울로7017’로 탈바꿈한 이후 해마다 동네의 모습이 바뀐다. “남대문시장과 회현동에서 시작되는 고가 보행로가 사람들의 발길을 중림동과 만리동으로 쉽게 이어준 덕분”이라고 상인들은 말한다.동네로 유입되는 사람들이 늘면서 맛집 등 ‘핫플레이스’들이 골목마다 등장했다. 독특한 콘셉트의 식당과 카페엔 주중에도 젊은이들이 붐빈다. 양식당 서울부띠끄, 퓨전레스토랑 베리스트릿키친 등이 대표적이다. 설렁탕집 중림장, 닭꼬치 가게인 호수집 등 노포(老鋪)들은 전국적인 맛집으로 떠올랐다. 근대 서울의 모습과 젊은이들이 즐겨 찾는 ‘핫플레이스’가 공존하는 곳. 중림동이 서울 도심 명소의 하나로 거듭나고 있다.현재와 과거가 공존…'반전 매력' 중림동2017년 5월 서울역 고가도로가 보행로인 ‘서울로7017’로 탈바꿈해 새로 개통됐다. 명동부터 중림동, 만리동까지 걸어갈 수 있는 새 길이 열렸다. 그전까지만 해도 두 지역을 오가려면 8차로 남대문로를 가로질러야 했다. 횡단보도도 4~5개를 건너야 중림동과 만리동에 닿을 수 있었다.서울로 손잡고 食食하게 성장한 중림동…2030 놀이터로 뜨다서울로7017 개통으로 사람들이 두 지역을 쉽게 넘나들자 중림동과 만리동이 달라지기 시작했다. 지금은 ‘중리단길’로 불리기도 하는 중림로가 먼저 변했다. 허름한 식당만 있던 대로변에 프랜차이즈 식당이 속속 들어섰다. 거리엔 활기가 돌았다.고가 보행로는 남산을 찾았던 시민과 외국인 관광객까지 중림동과 만리동으로 끌어들였다. 유동인구가 점점 늘어났다. 골목마다 변화가 나타났다. 20~30대 ‘젊은 사장님들’이 요리하는 식당도 속속 생겨났다.‘젊은 사장들’ 유입…동네가 달라진다중림동과 만리동에서 요즘 가장 크게 달라지고 있는 지역은 서울로7017과 서부역 교차로가 맞닿은 곳이다. 고가 보행로를 내려오면 만나는 넓은 광장은 화물차량 등이 즐비하던 공동 차고지를 3년 전부터 개조해 조성했다. 이곳이 ‘만리광장’으로 탈바꿈한 뒤 주말마다 야외 패션쇼, 플리마켓 등이 열린다.이 지역 맛집 지도를 바꾸고 있는 주인공은 패션, 브랜드 디자이너들이다.서울로7017에서 중림동 방면으로 내려와 왼쪽으로 3분 정도 걸으면 나오는 ‘베리 스트릿 키친’이 대표적이다. 아모레퍼시픽과 현대카드 등에서 일했던 오준식 디자이너가 문을 연 가게다. 오 디자이너는 브랜드디자인 기업 베리준오의 대표로 서울로7017 로고를 디자인한 사람이다. 베리 스트릿 키친은 1910년대부터 병원으로 사용하던 건물을 리모델링했다. 식당 내부에 10여 명이 앉을 수 있는 둥근 식탁을 뒀다. 손님들이 서로 어울릴 수 있도록 했다. 메뉴도 독특하다. 타이베이 삼겹살찜(1만5000원) 등 세계 길거리 음식을 맛볼 수 있다.만리동 도로변 끝자락에 있는 카페 ‘더하우스1932’는 건물 자체가 역사다. 일제 강점기 때 사용하던 적산가옥을 개조했다. 성민제 아주대 경영대학 교수가 운영한다. 방송국 미술감독 출신인 박수남 상상도가 대표가 내부 디자인을 맡았다.카페 ‘현상소’도 중림동의 핫플레이스다. 이태원에서 ‘야채가게’란 이름의 비스트로를 운영하는 홍용기 대표가 서미원 디자이너, 황현식 셰프 등과 함께 문을 열었다. 과거에 영화 필름 현상소가 있었던 장소다.외부인들에게 만리동을 적극 알리는 젊은이도 있다. 더하우스1932 아래편에 ‘종종서울’과 만리동 도로변에서 ‘오헤어22’란 바를 운영하는 이종화 대표다. 이 대표는 서울 도시 골목길을 투어하는 커뮤니티 동호회 ‘라이프쉐어 다이빙클럽’에서 만리동 골목길 가이드로 활동하고 있다.역사적인 공간도 많아끊임없이 변하기만 하는 것은 아니다. 동네를 꿋꿋하게 지키는 역사적인 공간도 적지 않다.한국에서 가장 오래된 약현성당은 중림동의 터줏대감이다. 명동성당보다 6년 빠른 1892년에 지어졌으니 무려 128년의 역사를 자랑한다. 국내 최초의 서양식 벽돌 건축물로 사적 제252호로 등록돼 있다. 약현성당은 프란치스코 교황이 방문한 뒤 더 유명해졌다. 천주교 신자들의 결혼식 장소로 인기가 높다. 영화 ‘약속’, 드라마 ‘열혈사제’ 등의 촬영 장소로도 유명하다.약현성당에 올라 내려다보면 서소문역사공원 한쪽이 눈에 들어온다. 서울역과 충정로역 사이 서소문 밖 네거리는 한국 천주교 역사상 가장 많은 순교자가 나온 성지다. 신유박해, 기해박해, 병인박해 등을 거치며 수많은 사람이 처형당한 가슴 아픈 역사의 공간이다.지난해 이곳엔 ‘서소문성지 역사박물관’이 문을 열었다. 대한민국 종교 박물관의 새 역사를 썼다는 평을 듣는 곳이다. 지하 4층에서 지상 1층까지 총 5개 층으로, 천주교 순교자의 추모 공간이면서 동시에 현대미술 작품이 들어선 전시 공간이 됐다.명동성당부터 서소문역사공원, 절두산 순교성지와 가회동 성당까지 천주교 사적지와 순교 성지를 잇는 약 27㎞의 길은 아시아 최초로 로마 교황청의 공식 순례지로 선포되기도 했다.안효주/오현우 기자 joo@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