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시 여행자를 위한 파리 X 역사' 출간

책이건 유튜브건 인터넷이건 여행 정보가 넘쳐나는 세상이다.

골목골목의 맛집과 가게, 교통수단 등 웬만한 여행지라면 내가 사는 동네에 대해 알고 있는 것보다 더 세세한 정보를 클릭 몇번으로 쉽게 입수할 수 있다.

이런 정보도 물론 필요하지만, 여행하고자 하는 도시가 어떻게 형성됐고 그 문화의 뿌리는 어디이며 그곳에 사는 사람들은 어떻게 살아왔는지, 간단히 말해 역사를 알고 간다면 더 좋지 않겠는가.

왕성한 저작과 강연 활동을 통해 역사 대중화에 앞장서는 주경철 서울대 서양사학과 교수가 이런 생각을 하는 사람들에게 딱 맞는 책 '도시 여행자를 위한 파리 X 역사'를 내놓았다.

서양사학자 주경철 교수가 쓴 파리 안내서
이 책은 갈리아인 일파이자 오늘날 파리라는 이름의 기원이 된 파리지족이 센강 서쪽 지역에 들어와 자리를 잡은 기원전 3세기 무렵부터 역동성과 전통을 함께 지닌 매력적인 도시로 자리매김한 현대에 이르기까지 파리가 겪은 온갖 영광과 고난을 다룬다.

파리를 살다간 왕, 귀족, 군인, 예술가, 철학자, 혁명가, 역사의 결정적인 순간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던 시민들, 그리고 그들이 일하고 쉬고 싸우고 기도하고 사랑을 나눈 거리와 광장과 궁궐과 성당들의 이야기다.

오늘날 관광객들의 촬영지로 빠지지 않는 루브르박물관과 베르사유 궁전, 퐁뇌프 다리, 노트르담 대성당, 에펠탑 등이 지어지게 된 과정을 따라가다 보면 자연스럽게 파리의 역사에 가 닿게 된다.

'파리가 곧 프랑스'라는 말이 있듯이 파리의 역사는 곧 프랑스의 역사이기도 하다.

파리에서 연상되는 이미지로 세련미와 화려함을 떠올리는 사람들이 많겠지만 세계 여느 도시와 마찬가지로 '빛의 도시'라는 별명을 지닌 이 도시도 어두운 시기를 지났고 아직도 어두운 구석을 지닌다.

낭만적일 것만 같은 파리 시민들은 걸핏하면 무기를 들고 일어나 도심에 바리케이드를 치고 정부군과 '맞장' 뜨는 거친 성정의 소유자들이다.

'노란 조끼 시위'가 느닷없이 일어난 사건은 아님을 파리의 역사를 통해 알게 된다.

파리가 문화, 예술의 도시로 이름 붙일 만하게 된 것도 그리 오래전이 아니다.

거리에는 사람들이 창문을 통해 내다 버리는 분뇨로 악취가 진동하고 말똥이 득실거렸다.

이런 오물이 흘러든 강물을 식수로 사용하는 비위생적인 환경 때문에 콜레라가 주기로 창궐했다.

시신을 처리하는 시스템이 미비해 함부로 매장한 시신이 부풀어 올라 공동묘지 지하벽을 무너뜨리고 시체가 땅 위로 드러나는 일까지 종종 있었다고 한다.

파리 시내에 난립한 30개 묘지에서 이런 문제가 속출하자 이 시신들을 한때 채석장이었던 곳에 모으기로 했다.

수많은 해골이 탑을 이루는 기괴한 모습의 파리 지하납골당이 만들어지게 된 배경이다.

파리는 또 고난의 도시이기도 하다.

9세기에는 배를 타고 센강을 거슬러 오른 바이킹들의 침략에 시도 때도 없이 시달려야 했다.

910년 견디다 못한 당시 국왕 샤를 3세는 바이킹들에게 아예 국토 일부를 내주기로 한다.

잘 알려진 대로 이 땅이 노르망디, 즉 '북쪽사람(노르만)의 땅'이라는 이름을 갖게 됐다.

불 지르고 약탈하고 사람 목을 자르는 게 주특기였던 '북쪽 사람들'은 몇 세대 지나지 않아 가톨릭을 믿는 문명인이 된다.

1328년에는 백년전쟁이 시작됐고 전쟁 기간 대기근, 페스트, 내전이 겹쳐 극심한 고통을 겪었으며, 16세기 종교전쟁으로 수많은 인명이 신의 이름으로 희생돼야 했다.

1789년 프랑스 대혁명은 인류 역사의 거대한 전환을 불러온 사건이었지만 수많은 사람이 죽이고 죽는 대재앙이기도 했다.

국내의 혼란에 더해 혁명을 저지하려는 외세와 전쟁도 해야 했다.

세계 최초의 '인권선언'을 내놓고 자유·평등·박애의 기치를 높이 든 파리인들이 나폴레옹의 독재를 쉽게 받아들이고 그의 황제 즉위에 환호한 까닭은 그만큼 피가 피를 부르는 혼란에 진절머리가 났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프랑스 혁명 당시 처형장으로 쓰였던 혁명광장은 '콩코르드(화합) 광장'으로 이름을 바꿨다.

서양사학자 주경철 교수가 쓴 파리 안내서
1870년 파리를 침공한 프로이센군이 완강한 저항에 직면하자 포위 작전에 나서면서 파리인들은 '인육을 섞은 빵'으로 연명해야 할 정도로 극심한 고난을 겪게 된다.

결국 패전으로 이어진 이 전쟁의 후유증이 낳은 파리코뮌의 참사는 어떤 면에서 외세와 겨룬 전쟁보다 더 비극적이다.

튀일리 궁전, 시청, 회계청, 재무청, 레지옹도뇌르 등이 불탔고 정부군 진압과정에서 2만~3만명이, 진압 후 3만명이 각각 살해되거나 처형됐다.

마지막까지 저항하던 147명이 총살돼 묻힌 '파리코뮌의 벽'은 지금은 전 세계 좌파들의 성지다.

그리고 두 차례에 걸친 세계 대전의 참화는 새삼 언급할 필요도 없다.

흥미로운 것은 2차 대전에서 프랑스에 승리를 거두고 파리를 점령한 아돌프 히틀러가 파리를 파괴하려 했으나 결국 실행되지는 않았다는 이야기다.

파리에 입성한 히틀러는 곳곳의 명소를 둘러본 뒤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파리가 아름답기는 하지만 베를린이 훨씬 더 아름답다고 해야겠지. 과거에 나는 파리를 파괴해야 하지 않을까 고려했다네. 그런데 베를린이 멋지게 완공되면 파리는 그림자에 불과할 거야. 그러니 뭐하러 부수겠나?"
서양사학자 주경철 교수가 쓴 파리 안내서
이랬던 히틀러도 노르망디 상륙작전 이후 전황이 역전되고 파리에서 독일군이 철수하게 되자 현지 지휘관에게 파리의 다리와 주요 공공건물을 파괴하라는 명령을 내린다.

그러나 스웨덴 출신 외교관인 라울 노르틸링이 독일군 지휘관을 설득해 파괴 방침을 단념하도록 했다.

지금의 파리를 있게 한 숨은 공로자인 셈이다.

이런 시련을 견뎌내며 파리는 변신하고 성장했다.

파리의 골목골목에 수천 년의 역사가 서려 있다.

저자는 파리의 건축이나 예술을 이해하기 위해 해당 분야를 공부하는 것도 의미 있는 일이지만 결국 이 모든 것을 이해하기 위한 토대는 바로 파리의 역사일 것이라고 파리 여행자들에게 조언한다.

책은 파리 여행 추천 코스와 함께 책에서 소개된 여러 명소의 위치와 구글지도 좌표를 알려주는 지도도 함께 실었다.

휴머니스트출판그룹. 376쪽. 1만9천원.
서양사학자 주경철 교수가 쓴 파리 안내서
/연합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