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원된 몽촌토성. 백제 전기의 성이었으며 고구려가 점령한 뒤에는 군사성으로 사용됐다.
복원된 몽촌토성. 백제 전기의 성이었으며 고구려가 점령한 뒤에는 군사성으로 사용됐다.
백제는 활발한 해양활동을 바탕으로 국가경영에 성공한 나라다. 경제적으로 풍요로웠고, 멸망할 당시 인구만 해도 76만 호(약 380만 명)로 삼국 가운데 가장 많았다. 해양 활동만큼이나 해외 진출도 많았다. 663년 백강(백촌강)전투에서 나당 연합군에 패배한 뒤 백제인 다수가 일본열도로 탈출하면서 자랑스러운 역사가 안타깝게도 많이 잊혀졌다.

기원전 20년쯤의 어느 날, 주몽을 도와 고구려를 건국한 홀본부여의 소서노, 그의 아들인 비류와 온조, 군사와 백성들은 압록강 하류를 출항했다. 새로운 국가건설을 꿈꾼 그들은 원조선인들의 이주와 무역로였던 연근해항로를 이용해 서해안을 내려오다 경기만 한강 하류에 상륙했다. 경기만은 넓고 작은 만들이 발달한 데다 동아지중해의 여러 항로와 연결되는 해양교통의 십자로다. 또한 이 해역으로 흘러드는 한강은 전장 512㎞에 달하는 하계망을 이용해 내륙을 통합시키는 데 유리하며, 하류에 충적평야가 발달했다.

백제의 중추가 된 위례성

[윤명철의 한국, 한국인 재발견] 수륙 물류 중심지에서 일어난 백제…서해 해상권 확보에 전력
<삼국사기>에 따르면 온조(溫祚)는 위례성(지금의 서울 강동구, 송파구 일대)에 도읍을 정하고 십제(十濟·백제의 초기 국가명)를 세웠다. 서울은 남한강과 북한강의 넓은 수계망을 이용한 수륙교통과 해양교통이 교차하면서 온갖 물품이 모여드는 물류의 허브였다. 바다를 항해하던 배들이 1930년대까지도 서빙고까지 영향을 끼치는 밀물을 이용해 마포, 용산까지 들어왔다. 이른바 ‘하항도시’와 ‘해항도시’의 성격을 복합적으로 지닌 ‘강해(江海)도시’였다.

형인 비류는 바닷가인 미추홀(인천 문학산성 일대)로 이동해 정착했다. 인천 지역은 해양 진출과 무역에 적합하며, 소금과 해산물을 얻기 유리한 해항도시였다. 하지만 땅이 습하고 조석 간만의 차이가 심해 양질의 항구는 아니었다. 수군 공격에도 노출되는 취약점이 있었다. 결국 부여의 정통성과 계승성을 놓고 국력경쟁에서 승리한 온조는 서울 지역을 중심으로 한 백제로 발전했다.

<삼국지> 한전에 따르면 그 무렵 서울, 김포, 강화, 인천, 안산 등의 강나루와 포구에는 마한에 속한 크고 작은 소국들이 있었다. 온조왕이 아산 일대를 공략한 이후 백제의 임금들은 이런 소국을 병합해 갔다. 고이왕은 236년 서해의 큰 섬(영종도나 강화도로 추정)에서 군사를 이끌고 사슴사냥을 했는데, 이는 한강 하구와 경기만 지역을 지배하고 있음을 선언한 행위였다.

농업, 어업 활발한 농해(農海)국가

풍납토성에서 발견된 어망추. 한강에서 어업이 성했음을 보여준다.
풍납토성에서 발견된 어망추. 한강에서 어업이 성했음을 보여준다.
한강변의 풍납토성(송파구 풍납동)이 1997년부터 재발굴되면서 성벽은 둘레 3.7㎞, 너비 40m 이상, 높이 11m에 이르고, 삼중겹의 환호가 둘러싼 거대한 규모로 확인됐다. 그 안에서는 큰 집터들과 포장된 도로 외에도 진나라의 초두(청동제 주전자)를 비롯해 토기, 어망추 같은 유물이 대거 발견됐다. 기원전 쌓은 왕성으로 밝혀졌다. 근처의 몽촌토성(올림픽공원)에서는 서진의 도기 파편들이, 거대한 규모의 석촌동 고분군에서는 동진 계통의 자기가 발견됐다. 이뿐만 아니라 원거리인 개성 부근을 비롯 원주 근처의 법천리에서도 서진과 동진의 자기들이 발견됐다. 이렇게 백제는 초기부터 내륙의 강가와 해양에서 농업과 어업, 무역을 활발하게 추진한 ‘농해(農海)국가’로 발전했다.

그러다가 4세기에 들어와 최대의 정복군주인 근초고왕이 등장했다. 그는 해양의 중요성을 더 확실하게 인식하고, 한강 수계를 장악하고 서해 중부의 ‘해양영역’을 확보하는 일을 국가의 목표로 정했다. 결국 근초고왕은 남방 진출을 시도하는 고구려와 정면으로 충돌했다. 백제군은 371년 평양성을 공격해 고국원왕을 전사시켰다. 또한 전라도 해안의 마한 세력을 흡수하면서 제주도와 일본열도로 이어지는 물류체계의 많은 부분을 장악했다. <일본서기>에 따르면 그 무렵 백제인인 아직기가 말을 갖고 건너가 사육을 시작했고, 박사인 왕인은 논어와 천자문을 전했다.

‘요서진출설’과 적극적 국제전략

4세기 말까지 고구려와 백제는 100㎞ 이내의 내륙 공간에서 치열하게 공방전을 벌였다. 고구려 광개토태왕이 등장해 백제의 해양기지인 관미성을 점령, 전세가 역전됐다. 태왕은 다시 396년 수륙양면작전을 펼쳐 경기만의 58성, 700여 촌을 함락시키고 한성을 포위해 항복을 받아냈다. 해양력이 삼국의 역학관계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 것이다.

이후 백제는 계속되는 고구려의 남진을 방어하고 동쪽으로는 신라의 성장을 억제하기 위해 왜(일본)와 적극적으로 관계를 맺었다. 또 양쯔강 하류로 도피한 한족이 세운 송나라, 제나라 등 남조 국가들과 활발하게 교섭을 벌여 국제질서에 진입했다. 반면 선비족이 화북 일대에 세운 북위와 교류하는 일은 현실적으로 어려움이 많았다. 그래서 <위서>와 <삼국사기>에 실린 백제 개로왕이 북위에 보낸 국서에는 이런 내용이 있다. ‘이리와 승냥이 같은 것들이 길을 막았으며, (중략) 거친 물결에 배를 띄우고…’라고 기록해 바닷길이 중요했음을 알려준다. 북위도 역시 고구려의 방해가 있었고 바닷길이 험해 백제에 사신을 파견하지 못했다.
 백제가 진출했다고 주장되는 중국 요서지역의 영평부 유적. 기자의 조선 성터라는 주장도 있다.
백제가 진출했다고 주장되는 중국 요서지역의 영평부 유적. 기자의 조선 성터라는 주장도 있다.
그런데 몇몇 사료의 기록을 근거로 이 무렵 백제가 요서지역을 지배했다는 ‘요서 진출설’이 주장됐다. 중국의 <송서>(488년)는 ‘백제는 본래 고구려와 더불어 요동의 동쪽 천여 리에 있다. (중략) 백제 또한 요서를 침략해 점령했다’고 전하고 있다. 또 백제가 다스린 지역을 ‘진평군 진평현’이라고 기록했다. <남제서>(6세기 전반)에도 ‘백제군을 두었는데, 고려(고구려)의 동북에 있다’라고 나와 있다. 그 밖에 <양서>와 <남사>는 물론이고, <통전>(801년)은 ‘유성(현재 랴오닝성 차오양)과 북평(베이징 근처) 사이’라고 위치까지 밝혔다.

그런데 문제는 있다. 묘하게도 <삼국사기>와 북조 계통의 역사책에는 이런 내용이 없다. 또 하나는 4~5세기 전반의 국제질서다. 당시 요서지방에선 유목종족의 나라들이 각축전을 벌이고 있었다. 고구려, 연나라, 후조, 동진은 발해만과 황해북부를 항해하면서 각각 군사작전과 외교, 무역을 복잡하게 벌이고 있었다. 이 같은 상황을 고려하면 백제가 기마군사들을 제압할 만한 병력을 배로 운송하고 물자를 조달해가면서 장기 주둔하는 일은 쉽지 않았을 것이다.

위기 이겨낸 해양력

그런데 백제로서는 전략적인 이점이 크다. 요서를 점령하면 고구려 배후지인 요동이나 압록강 하구지역 등을 수륙으로 공격하기에 유리했을 것이다. 항해상으로도 불가능한 것이 아니다. 백제의 선박들은 경기만을 출항한 뒤 고구려를 피해 산둥반도 근해에서 북상하면 발해해협을 통과해 육지에 상륙할 수 있었다. 대략 370마일(약 600㎞) 정도의 거리로, 요트를 타고 횡단하면 4~5일 걸린다. 그렇다면 고대의 쾌속선도 그 정도 걸렸을 것으로 추정한다.

이렇게 해양활동의 메커니즘과 해양환경을 고려한다면 요서의 해안 일대에 식민도시나 상업기지 등이 있었을 가능성이 있다. <수서>는 ‘백제(百濟)’라는 국명을 ‘백가제해(百家濟海)’ 즉 100가가 바다를 건너왔다는 의미라고 설명했다. 백제가 해양과 연관이 깊었다는 사실을 알려준다.

5세기 중반 이후 백제는 서해 중부의 해양력이 약화된 채 국제질서에 미숙하게 대응했다. 권력싸움과 사치로 내정도 실패했다. 그러다가 475년 장수왕의 3만 군대에 기습공격을 받아 한성이 점령당하고 개로왕은 전사했다. 다행히 피난한 세력들은 웅진(공주)에 도읍을 정하고, 현지 세력과 연합해 나라를 신속하게 재건했다. 또 일본열도에 적극적으로 진출하고 중국 지역과 활발하게 교류하면서 국제적인 위상도 회복해갔다. 이 새로운 백제의 성공에는 해양활동과 해양력의 복원이 큰 역할을 했다.(윤명철 <한국해양사>)

아차산의 후미진 기슭 벼랑 위에는 ‘개로왕의 무덤’으로 추정되는 돌무덤이 덩그러니 있다. 한강 너머로 풍납토성과 몽촌토성, 석촌동 고분군들, 고구려군의 도하 지점인 가래여울을 바라보면서.

윤명철 < 동국대 명예교수·한국해양정책학회 부회장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