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아침의 시] 코끼리 그늘로부터 잔디 - 이제니(1972~)
코끼리는 간다

들판을 지나 늪지대를 건너
왔던 곳을 향해 줄줄이 줄을 지어

가만가만 가다 보면 잔디도 밟겠지
어두워졌다가 밝아졌다가
발아래 잔디도 그늘이 되겠지

미안합니다 미안합니다
괜찮습니다 괜찮습니다

속으로 속으로 혼잣말을 하면서
나아갔다가 되돌아갔다가

코끼리는 간다

시집 <왜냐하면 우리는 우리를 모르고> (문학과지성사) 中

코끼리는 어디로 가고 있는 걸까요? 그건 모르겠지만, 밝은 곳과 어두운 곳을 지나, 들판과 늪을 지나, 떼 지어 나아갔다 돌아갔다 합니다. 잔디를 밟으며 미안합니다, 괜찮습니다, 혼잣말하는 둔중한 코끼리를 떠올려 봅니다. 살면서 미안하다고, 괜찮다고 말해야 했던 날들을 떠올립니다. 잔디를 밟고 가는 코끼리의 난감함을 떠올리면, 어쩐지 몸이 따뜻해지는 것 같습니다.

주민현 < 시인(2017 한경 신춘문예 당선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