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다른 덕질로 세상 이롭게 했다"…물맛도 시간과 장소 따라 달라
한국국학진흥원 웹진 담 10월호 펴내

"앞선 안목과 남다른 지식, 뜨거운 열정으로 낡은 것을 새롭게 한 시대의 선구자들, 덕후."
한국국학진흥원은 '조선 시대 덕후들'이란 주제로 스토리테마파크 웹진 담(談) 10월호를 발행했다고 7일 밝혔다.

덕후는 일본어 오타쿠를 한국식으로 발음한 '오덕후' 줄임말이다.

지금은 어떤 분야에 몰두해 전문가 이상 열정과 흥미를 가진 사람이라는 긍정 의미로 쓰인다.

몇 년 전만 해도 쓸데없는 짓 하고 다닌다고 욕먹었을 일들이 지금은 사람들 부러움을 사고 전문가로서 인정을 받는다.

이에 따라 조선 시대에도 존재한 어떤 분야에 몰두해 전문가 이상 열정과 흥미를 지닌 덕후를 확인하고 현대 사회에 유효한 이야기들을 생각하기 위해 이를 기획했다고 한다.

한국국학진흥원에 따르면 좋은 차와 술을 가려 마시는 것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덕후들 대표 영역이나 조선 시대 선현은 물도 맛을 섬세하게 가려 마셨다.

양반 집에서는 물을 12가지로 구분해 각각 다른 독에 담아두고 용도별로 썼다.

이를테면 입춘날 받아둔 '입춘수'는 아들을 낳게 한다고 해서 부부가 잠자리에 들기 전에 한 잔씩 들이켰다.

입동 열흘 뒤에 내리는 빗물을 '약우수'라며 약 달이는 물로 사용했다.

자른 대나무 속에 고인 물은 '반천하수'라고 말하며 역시 약을 달이는 물로 썼다.

앞선 안목·열정으로 낡은 것 새롭게 한 조선시대 덕후 이야기
물은 위치와 맛에 따라서도 다르게 이름을 붙였다.

서울 북악산을 중심으로 오른쪽 인왕산 줄기에서 흐르는 물을 '백호수', 왼쪽 삼청동 뒷산에 흘러내리는 물은 '청룡수', 남산에서 흐르는 물은 '주작수'라고 했다.

선비들은 물맛도 까다롭게 구분했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물맛이 좋은 물로는 충주 '달천수'를 꼽았다.

오대산에서 나와 한강으로 흘러드는 '우중수'를 둘째, 속리산에서 흐르는 '삼타수'를 셋째로 쳤다.

같은 물이라도 산꼭대기에서 나는 물과 산 밑에서 나는 물맛이 다르고, 바위 틈새에서 나는 물과 모래에서 나는 물맛이 차이가 난다고 했다.

고인 물보다 흐르는 물, 양지쪽 물보다는 응달 물을 더 맛있는 물로 쳤다.

황희 정승은 무거운 물을 '군자물'이라며 맛있는 물로 꼽았다.

율곡 역시 오대산 암자 일학 스님과 함께 물맛을 보는 취미를 즐겼다.

무게로 물맛을 따졌단다.

조선 시대 선현은 때와 장소에 따라 물맛을 섬세하게 분류하는 물 덕후인지라, 명승고적을 유람하며 얻는 즐거움에는 물도 한몫했다.

1841년 4월 5일 강희영이란 선비가 기록한 '금강일기'에는 금강산 물맛이 상세히 나와 있다.

강희영과 일행은 금강산 표훈사와 팔담, 백운대를 구경하고 내려와서 금강수(金岡水)를 마신다.

이 물은 매우 맑고 차서 사람 피부와 뼈를 침으로 찌르는 것 같았다고 한다.

강희영과 일행은 도시락을 먹은 뒤 금강수를 석 잔 더 마셨다.

약을 달이는 데 쓰는 귀한 물이어서다.

조선에 덕후가 등장한 시기는 대략 18세기다.

세계사로 보면 근대가 태동할 때이고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겪은 조선 역시 대변혁을 맞는다.

몇백년 동안 공고히 조선을 지배한 성리학 질서에 균열이 생기고, 청나라에서 서구 신문물이 들어오며 지식인 계층부터 현실 부조리에 눈 뜨며 새로운 세상을 바라는 열망이 불붙기 시작했다.

이 시대에 등장한 덕후들은 선구자 경향을 띠었다.

주변 시선이나 현실 보상에 연연하지 않고 새로운 분야에 몰두했다.

조선 시대 덕후들을 벽(癖), 광(狂), 치(痴) 등 표현으로 말했는데 '병든', '미친', '어리석은'과 같은 부정하는 호칭이다.

조선 선비사회에서는 사회 질서를 유지하기 위한 학문, 교육, 정치 등을 뺀 일에 관심 갖는 일을 '완물상지'(玩物喪志·사물에 탐닉하면 뜻이 상한다)라며 경계했다.

그런데도 조선 덕후들은 기꺼이 스스로를 '환자', '미친 자', '바보'라 칭하며 열광을 발산했다.

소설가 김현경은 웹진 담 10월호에 실린 '이 구역의 미친 자는 나요!'라는 글에서 조선 시대 덕후 베스트 5를 소개한다.

5위는 담배 덕후 이옥(李鈺 1760∼1813)으로 담배를 피우는 것에 그치지 않고 '연경'이라는 책을 집필하고 담배와 관련한 모든 것을 집대성했다.

4위는 꽃 덕후 유박(柳璞 1730∼1787)이다.

백화원이라는 화원을 경영하며 만금을 들여 온갖 꽃을 수집했고 연구 결과를 '화암수록'이란 책으로 남겼다.

책 덕후 이덕무(李德懋 1741∼1793)는 3위에 올랐다.

생계를 잇기 힘든 어려운 가정형편에도 애정과 열정으로 모은 책이 수백권, 읽은 책이 2만권에 이른다.

2위인 여행 덕후 정란(鄭瀾 1725∼1791)은 전국 곳곳을 여행하고 산에 올랐으며 직접 여행기를 썼다.

인생에 마지막 목표인 백두산과 한라산 여행도 당시로는 노인이던 50대 후반에 했다.

1위로는 벼루 덕후 정철조(鄭喆祚 1730∼1781)를 꼽았다.

정철조는 별다른 연장도 없이 칼 하나만 갖고 다니며 적당한 돌만 보면 닥치는 대로 깎아 명품 벼루를 만들었다.

자기가 만든 벼루를 누가 달라고 하면 거저 다 주어 버렸다고 한다.

학문과 기술에서 빼어난 재주를 갖고 있었으나 지나치게 시대를 앞서간 안목과 호방하고 자유로운 성정 탓에 크게 뜻을 펼치지 못했다.

그 답답함을 술로 풀다 건강을 해쳐 아까운 나이에 급사하고 말았다.

천준아 웹진 9월호 편집장은 "때때로 지나치게 무언가를 좋아하다 보면 단순히 좋아하는 에너지가 그 이상 괴력을 발휘할 때가 종종 있다"며 "남다른 덕질로 사람을 이롭게 한 조선 덕후들 이야기를 많이 발굴해 역사 콘텐츠로 창작하길 바란다"고 말했다.

/연합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