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성에서는 학문을 논하지 말라'(問不如長城)는 말이 있다.

뛰어난 학자를 많이 배출한 고장이어서 나온 말이다.

[한국의 서원] ② '호남 공자' 하서를 만나다

그중 한 명을 꼽으라면 단연 하서(河西) 김인후(1510∼1560)다.

필암서원은 정조가 "해동의 염계(중국 북송 시대 성리학의 기초를 닦은 주돈이)이자 호남의 공자"라 칭했던 김인후를 제향하는 곳이다.

성균관 문묘(文廟)는 공자를 모신 사당으로 그의 제자들과 조선의 유학자 18명(동국 18현)을 함께 배향하고 있다.

동국 18현 중 유일하게 호남 인물이 있으니 바로 김인후다.

장성 황룡면 맥동마을은 하서가 태어난 곳. 마을 입구 도로변에는 커다란 바위가 하나 서 있는데 '筆巖'(필암)이란 글자가 새겨져 있다.

예부터 붓 모양 산이나 바위가 있는 곳에서는 대학자가 난다고 하는데, 이곳에 바로 붓 바위가 있다.

하서를 모신 서원의 이름도 이 바위에서 비롯했다.

어릴 때부터 문장에 뛰어났던 김인후는 31세에 문과에 급제했고 이후 세자(훗날 인종)의 스승이 됐다.

그가 설파한 유교 정치의 이상에 감동한 인종은 그 뜻을 변치 말자며 '묵죽도'(墨竹圖)를 그려줬다.

하지만 인종이 재위 9개월 만에 갑자기 승하하자 하서는 고향에 돌아가 출사하지 않고 시와 술을 벗 삼았고 성리학 연구와 글쓰기에 몰두했다.

그의 인품은 1560년 명종실록에 실린 그의 졸기(卒記)에서 엿볼 수 있다.

실록은 "타고난 자품이 청수(淸粹)했다.

5∼6세 때 문자(文字)를 이해해 말을 하면 사람을 놀라게 했고, 장성해서는 시문을 지음에 청화하고 고묘(高妙)하여 당시에 비길 만한 사람이 드물었다.

사람들은 그의 용모만 바라보고도 이미 속세의 사람이 아닌 것을 알았다.

술과 시를 좋아했고, 마음이 관대해 남들과 다투지 않았으며 그가 뜻을 둔 바는 예의(禮義)와 법도를 실천하려는 것이었으므로 감히 태만하게 하지 않았다"고 했다.

[한국의 서원] ② '호남 공자' 하서를 만나다

◇ 봉황함서의 길지에 들어서다
필암서원은 맥동마을에서 동쪽으로 차로 5분 거리에 있다.

세 차례 옮겨지며 1672년 중건된 것이다.

첫 서원은 1590년 황룡강과 문필천이 합류하는 장성읍 기산리의 무등산이 훤히 보이는 풍광 수려한 터에 세워졌다.

하지만 서원은 1597년 정유재란 때 왜(倭)에 의해 소실되고 만다.

왜는 의병의 산실이었던 이곳을 잿더미로 만들었다.

1592년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김인후의 후손인 김경수를 중심으로 모집된 의병이 왜적을 무찔렀기 때문이다.

서원은 소실된 지 27년 만인 1624년 황룡면 증산동에 다시 건축됐고, 1662년 '필암'이란 편액을 받으며 사액됐다.

그러나 1671년 큰물로 모든 건물이 무너졌고 이듬해 현 위치로 옮겨 세워졌다.

임지현 해설사는 "필암서원은 봉황이 임금의 서찰이나 책을 물고 있는 형국인 봉황함서(鳳凰銜書)의 길지에 들어서 있다"고 설명했다.

봉황함서는 중국 주(周)나라 때 봉황이 천서(天書)를 입에 물고 문왕의 도읍지에 날아와 노닐어서 무왕이 그 봉서(鳳書)의 기(紀)를 받게 되었다는 고사에서 유래했다.

필암서원은 봉황의 머리에 해당하는 성진산 아래 평지에 들어서 있다.

신성한 장소임을 알리는 홍살문 옆에는 말이나 가마를 타고 내릴 때 디딤돌로 사용하는 하마석이 놓여 있다.

홍살문을 지나면 서원의 정문이자 휴식처인 확연루(廓然樓)가 서 있다.

층마다 문이 3개씩 달린 팔작지붕 건물로 아래층 좌·우측 문을 통해 드나든다.

가운데 신문은 봄과 가을에 제사를 지낼 때만 사용한다.

높이가 낮은 문을 드나들 때는 자연스레 고개가 숙어진다.

깔끔하면서도 힘이 있는 현판 글씨는 우암 송시열이 쓴 것이다.

하서 선생의 마음이 맑고 깨끗해 확 트여 있고 크게 공정하다는 뜻이다.

확연루에서는 넓은 들판과 문필천이 보이고, 서원의 정갈한 건물들이 내려다보인다.

확연루와 유생들이 공부하고 회의하던 공간인 청절당(淸節堂) 사이 너른 마당에는 필암서원의 역사와 함께한 커다란 은행나무 두 그루가 서 있다.

공자가 은행나무 단 위에서 제자를 가르쳤다고 해서 흔히 강학하는 곳을 행단(杏亶)이라고 하는데, 이곳에선 은행나무를 심어 청절당이 강학하는 곳이라는 것을 알려준다.

단아한 '청절당' 현판 글씨는 동국 18현 중 한 명인 동춘당 송준길이 썼다.

확연루와 청절당은 모두 북쪽으로 확 트여 있고, 남쪽이 막힌 구조다.

건물들이 북쪽에 있는 사당인 우동사(祐東祠)를 향하고 있다는 뜻이다.

[한국의 서원] ② '호남 공자' 하서를 만나다

유생들이 공부하며 생활하던 동·서재를 지나 우동사의 내삼문 왼편에는 팔작지붕에 단청이 화려한 경장각(敬藏閣)이 자리한다.

정조가 하서를 문묘에 배향하면서 세운 건물로, 초서로 쓴 편액 글씨는 정조의 친필이다.

이곳에 바로 인종이 하사한 묵죽도의 판각이 보관돼 있다.

내부에는 크기가 다른 판각 2개가 놓여 있고, 액자를 씌운 묵죽도가 벽에 걸려 있다.

색깔이 많이 바랬지만 소나무, 꽃 등을 그린 단청도 아직 남아 있다.

경장각 처마도리에는 여의주를 문 용과 함께 봉황이 조각돼 필암서원이 봉황함서의 길지임을 알리고 있다.

우동사 내삼문 왼편에는 계생비(繫牲碑)가 서 있다.

제사를 지낼 때 제물로 사용할 가축을 매어 놓는 비석으로, 제관은 가축을 검사한 후 제물로 사용할지 여부를 결정했다고 한다.

계생비 뒷면에는 서원의 건립 취지와 연혁이 기록돼 있다.

계생비 뒤로 담을 쌓아 구분한 공간 중앙에 우동사가 있다.

송시열이 쓴 신도비명에 "하늘의 도움으로 동방에 태어난 이가 바로 하서 김 선생이다"라는 뜻에서 붙인 이름이다.

편액은 주자의 글씨를 집자한 것이다.

이곳에는 사위이자 소쇄원을 지은 양산보의 아들인 양자징의 위패가 함께 모셔져 있다.

우동사 동쪽에는 김인후의 글이나 목판을 보관한 장판각이 있다.

서원 정문 맞은편에는 유물전시관이 있다.

필암서원 소속 노비를 기록한 '노비보', 역대 원장의 명단을 기록한 '원장선생안', 방문자 명단인 '봉심록' 등 보물 제587호로 지정된 고문서를 비롯해 붓, 벼루, 책장, 현판 등의 유물을 볼 수 있다.

필암서원에서 서쪽으로 차로 10분 거리에는 하서가 매년 인종의 제삿날인 7월 1일에 올라 통곡했다는 난산이 있다.

하서의 행적을 기록한 난산비를 지나 계단을 오르면 하서가 그리움과 슬픔을 쏟아낸 '통곡대'란 이름의 사각 바위가 놓여 있다.

[한국의 서원] ② '호남 공자' 하서를 만나다

◇ 싱그러운 편백숲과 호숫가를 거닐다
필암서원 북쪽에 있는 축령산은 산림청이 '22세기를 위해 보존해야 할 아름다운 숲'으로 지정한 곳이다.

이곳에는 수령 50∼60년의 아름드리 편백과 삼나무가 거대한 숲을 이루고 있다.

삼림욕을 즐기기에 더할 나위 없는 곳이다.

모암주차장에서 걷기를 시작했다.

주차장 앞으로 편백림이 울창하다.

하늘을 향해 쭉쭉 뻗은 모습이 보기만 해도 시원스럽다.

숲을 통과해 조금 오르자 경사 평탄한 산책로가 물소리 소란스러운 계곡을 따라 이어진다.

계곡 쪽 길은 나무 데크가 깔렸고, 그 옆으로 흙길 임도가 나란하다.

중간중간 벤치와 정자가 있어 쉬어가기도 좋다.

걷는 것만으로 가슴이 탁 트이고 마음이 치유되는 길이다.

숲내음숲길, 산소숲길, 건강숲길, 물소리숲길, 맨발숲길, 하늘숲길 등 코스도 다양하다.

아무 길이나 선택해 천천히 걸으며 삼림욕을 즐기면 된다.

축령산 편백숲은 '산림왕'으로 불린 춘원 임종국(1915∼1987) 선생이 한국전쟁으로 민둥산이 된 축령산에 평생 나무를 심어 조성한 인공조림 숲이다.

한 그루, 한 그루 심은 편백과 삼나무가 반백 년이 지나 보물이 됐다.

[한국의 서원] ② '호남 공자' 하서를 만나다

축령산에서 20분 거리에는 총 길이 7.5㎞의 장성호 수변길이 있다.

장성호 수변공원에서 계단을 오르면 수변 길이 시작된다.

장성호 왼쪽을 따라 조성된 수변길은 시원스러운 호수를 바라보며 걷는 가벼운 산책길이다.

출발지에서 1.2㎞ 지점에는 황금빛 출렁다리가 있다.

길이 154m, 폭 1.5m의 출렁다리 주탑은 두 마리 황룡이 마주하는 모습이다.

올해 말에 약 1㎞ 떨어진 곳에 제2 출렁다리가 개통할 예정이다.

필암서원 인근의 박수량 백비도 한 번쯤 들러볼 만하다.

조선 중기 문신 박수량(1491∼1554)의 묘 앞에는 아무 글도 없는 백비(白碑)가 서 있다.

박수량은 명종 때 청백리에 올랐던 인물로 "시호도 주청하지 말고, 묘 앞에 비석도 세우지 말라"는 유언을 남겼다.

너무 가난해 장례를 치르지 못하자 명종이 명해 장례를 치러줬는데 그때 상징적으로 백비를 세웠다고 한다.

[한국의 서원] ② '호남 공자' 하서를 만나다

※ 연합뉴스가 발행하는 월간 '연합이매진' 2019년 9월호에 실린 글입니다.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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