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정 행간 읽을 줄 알아야 진정한 공연 번역"
해외 뮤지컬은 국내 무대에 오르기 전 번역 작업을 거친다. 문학, 영화처럼 통·번역 대학원을 졸업한 사람들이 맡는 일은 드물다. 공연 연출이나 작곡가 출신들이 번역한다. 뮤지컬 원작 그대로 직역하기보다 많은 의역을 거쳐야 하기 때문이다. 국내 배우들의 감정을 최대한 풍부하게 이끌 만한 표현, 노래 길이와 박자에 맞는 표현으로 바꿔야 한다.

뮤지컬 ‘스위니토드’ ‘마틸다’ 등을 맡았던 김수빈 번역가(사진)도 마찬가지다. 그는 한국예술종합학교에서 연출을 전공했다. ‘맨오브라만차’ 등 공연 조연출과 다큐멘터리 ‘소꿉놀이’ 연출을 했다. 그러다 2008년 뮤지컬 ‘마이 페어 레이디’를 시작으로 번역 일에 뛰어들었다. 김씨는 “공연 번역은 눈에 보이지 않는 감정의 행간을 읽을 줄 알아야 한다”며 “작품 전체의 감정과 호흡을 잘게 해부한 다음 번역을 통해 살을 붙여 나가야 한다”고 설명했다.

그가 맡았던 작품은 20여 편에 달한다. 올해는 ‘그리스’ ‘시라노’ ‘스위니토드’ 등을 번역했다. 그는 미국에서 태어나 여덟 살까지 살아 영어에 능숙하다. 하지만 공연 번역엔 영어보다 ‘국어’가 더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똑같은 감정도 우리말로 어떻게 표현하느냐에 따라 느낌이 완전히 달라져요. 다양한 매체를 접하며 사람들이 평소 쓰는 말을 공부하고 있어요.”

작업 기간은 작품별로 다르지만 1년 반 넘게 걸릴 때도 많다. 각종 회의와 리허설을 할 때마다 찾아가 배우, 연출들과 소통하며 여러 번 수정해야 한다. “현장에서 배우들의 발성을 직접 듣고, 그에 맞게 유연하고 민첩하게 계속 고쳐야 해요. 최대한 잘 맞는 발음의 단어들을 찾는 거죠.”

지난해 초연된 뮤지컬 ‘마틸다’의 ‘미라클(miracle)’이란 넘버(삽입곡)도 많은 고민을 통해 탄생했다. ‘미라클’은 간단한 단어지만 ‘기적’으로만 직역할 수 없었다. 글자 수가 다를 뿐 아니라 ‘기적’이란 단어가 닫힌 소리를 내기 때문이다. “‘미라클 미라클’이라는 가사가 이어져 나오는데 이걸 ‘기적 기적’이라고 닫힌 소리를 반복해 내면 관객들이 듣기 불편해요. 그래서 ‘귀하죠’ ‘소중하죠’ 등 맥락에 맞게 다양한 표현으로 바꾼 거예요.”

오는 10월 개막하는 ‘스위니토드’ 번역에선 언어유희를 극대화하는 데 주력했다. 토드와 러빗 부인이 다양한 직업을 가진 사람들을 먹는 ‘파이’에 빗대어 함께 노래하는 넘버 ‘리틀 프리스트’가 대표적이다. ‘변호사 드셔보세요/이건 비싸겠는데/씹는 맛이 최고죠’라는 가사에서 ‘씹는 맛이 최고죠’는 그가 우리말이 가진 중의성을 살려 넣은 표현이다. 파이를 씹어 먹으면 맛있다는 의미와 변호사들이 말을 많이 하는 것을 함께 빗대어 표현한 것이다.

그는 창작 뮤지컬 작가로도 활동할 계획이다. “라이선스 공연 번역 일도 보람되지만 제가 온전히 다 쓴 작품을 올리고도 싶어졌어요. 영역을 굳이 구분하기보다 기회가 될 때마다 좋은 작품을 많이 선보이고 싶습니다.”

김희경 기자 hkkim@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