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국내 초연 이후 거의 매년 무대에 오르는 인기 뮤지컬 ‘엘리자벳’은 화려하고 고풍스러운 드레스로 관객을 사로잡는다. 이 무대에 들어가는 의상은 500여 벌. 드레스 안에 입는 코르셋과 슈미즈(여성 상의 속옷)까지 따로 제작된다. 서울 블루스퀘어 인터파크홀에서 공연 중인 뮤지컬 ‘벤허’도 ‘엘리자벳’ 못지않다. 총 400여 벌이 들어간다. 갑옷은 물론 배우들의 속옷 위에 이중으로 착용하는 속옷까지 포함해서다. 전투신 등으로 땀이 많이 나 옷이 달라붙지 않도록 하기 위한 것이다.
서울 성수동 작업실에서 만난 한정임 의상디자이너는 “뮤지컬 초연작인 경우 하나의 의상을 제작하는 데 최소 1년이 걸린다”고 말했다. /김영우 기자 youngwoo@hankyung.com
서울 성수동 작업실에서 만난 한정임 의상디자이너는 “뮤지컬 초연작인 경우 하나의 의상을 제작하는 데 최소 1년이 걸린다”고 말했다. /김영우 기자 youngwoo@hankyung.com
관객은 이런 속옷 사정을 전혀 알 수 없다. 그럼에도 두 작품의 무대 의상을 제작한 한정임 디자이너는 보이지 않는 부분까지 세심하게 제작했다. 지난 16일 서울 성수동 작업실에서 만난 한 디자이너는 “무대 의상은 배우의 강력한 에너지원”이라며 “배우가 내면의 감정을 자신감 있게 끌어낼 수 있도록 보이지 않는 의상까지 완벽하게 만들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가 무대 의상을 책임진 작품은 40여 편. 단 네 벌의 옷에 배우들의 감정을 담아낸 연극 ‘거미여인의 키스’, 화려한 의상으로 주목받는 뮤지컬 ‘모차르트!’와 ‘레베카’ ‘프랑켄슈타인’ ‘지저스 크라이스트 슈퍼스타’ 등이다.

한 패션회사에서 기성복을 제작하던 그가 무대의상에 관심을 두게 된 것은 영국 런던 웨스트엔드에서 뮤지컬 ‘오페라의 유령’을 보고 나서다. “의상에 인간의 희로애락과 풍부한 스토리가 다 담긴 걸 보고 큰 감동을 받았죠. 그런 일을 꼭 내 손으로 해보고 싶었습니다.”

시작은 2007년 뮤지컬 ‘실연남녀’. 이후 ‘클레오파트라’ ‘모차르트!’ 등으로 이어졌다. “대형 무대는 ‘모차르트!’가 처음이었어요. 정말 미친 듯이 밤을 꼬박 새우며 매달렸죠. 내년이면 ‘모차르트!’ 10주년인데 이 작품을 계속 올리며 저도 함께 성장해온 것 같습니다.”

무대 의상의 세계는 관객에게 보여지는 것 이상이다. 초연작인 경우 하나의 의상을 제작하는 데 최소 1년이 걸린다. “순수한 제작 기간은 3~4개월이지만, 그 전에 자료 수집 등 준비 기간을 따지면 1년은 걸려요. 머릿속에선 훨씬 이전부터 작업이 시작됩니다. 보통 의뢰가 2~3년 전에 들어오는데 그때부터 구상을 하거든요. ”

한 캐릭터의 의상이라도 배우별로 따로 제작해야 한다. 주인공이 입는 옷이 50벌이고 그 역할을 맡은 배우가 세 명이라면 150벌을 만들어야 한다. “체형이 천차만별이고 움직이는 패턴도 미세하게 달라요. 같은 옷이라 해도 소매 길이부터 절개 위치까지 조금씩 다릅니다.” 재연할 땐 일이 더 커진다고 했다. 제작비 부담으로 초연 때 썼던 옷을 그대로 써야 하는 경우가 많다. “재연할 때까지 옷을 보관한 뒤 다시 꺼내 살려내야 해요. 재연까지 2~3년 넘게 걸리기도 하잖아요. 오랫동안 잠들어 있던 옷에 생기를 불어넣으려면 옷을 처음부터 만드는 것보다 더 많은 시간과 노력이 필요합니다.”

인력도 많이 투입된다. 보통 옷을 만드는 제작팀 6명, 재단과 봉제 등을 하는 작업소팀 15~20명, 현장에서 배우들과 소통하며 옷을 관리하는 크루팀이 10명이다. “정말 많은 분의 땀과 노고로 의상이 제작됩니다. 그만큼 다들 자긍심이 있지만 아직은 창작 환경이 너무 열악해요. 이 과정을 알리고, 환경을 개선하는 데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도록 늦어도 2년 안에 무대의상 관련 아트 전시회를 여는 것이 제 목표입니다.”

김희경 기자 hkkim@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