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의 향기

경북의 보석 봉화 이야기
아름다운 문화유산 (2)
조선후기 중추원 의관 만산 강용이 고종 15년에 건립한 만산고택

조선후기 중추원 의관 만산 강용이 고종 15년에 건립한 만산고택

유서 깊은 고택과 문화유적이 남아있는 봉화는 마을 자체가 작은 박물관 같다. 마을을 걷다 우연히 곳곳에 숨어있는 문화유산을 만나는 즐거움은 봉화 여행의 또 다른 매력이 아닐까 싶다. 오랜 문화유산을 따라 선조들이 살던 시대의 한복판을 걸어보면 어떨까.

전통마을이 그대로 남아있는 물야면

춘향전 실제 모델 성이성의 집인 계서당

춘향전 실제 모델 성이성의 집인 계서당

물야면 가평리에 있는 계서당은 조선 중기 문신인 성이성이 광해군 5년(1613년) 건립하고 살았던 집이다. 성이성은 문과 급제 후 진주목사 등 5개 고을 수령을 지냈고 네 차례 어사에 등용됐다. 정면 7칸, 측면 6칸인 ㅁ자형 팔작지붕의 고택은 청백리로 이름난 그의 삶처럼 소박하다. 계서당은 그를 추모하고 제향하기 위한 사당이 있고 정자 1동, 방앗간 1동, 강당 1동은 무너져 그 터만 남았다. 성이성은 이몽룡과 성춘향의 사랑 이야기로 잘 알려진 <춘향전>의 실제 인물이라고 한다. ‘남원의 이몽룡이 아니라 봉화의 성몽룡’이라는 것을 고증할 만한 유물이 남아있는데, 1627년(인조 5년)에 치러진 식년시 과거 시험에 급제했을 때 임금이 직접 내린 어사화와 그 꽃받침을 보관하고 있다.

오록리 내성천을 따라가다 보면 이상적인 배산임수 형상을 한 오록전통마을이 있다. 1696년 노봉 김정이 이곳에 자리 잡고 풍산 김씨가 모여 살고 있다. 마을의 구휼미를 저장하는 큰 창고가 마을 입구에 생기면서 ‘창마’라고도 불린다. 오록전통마을 어귀에는 울창한 소나무들이 마을을 따라 이어지는데 제주에서 소나무 씨앗을 가져와 심었다고 한다. 제주의 돌담처럼 고택을 낮은 돌담으로 두른 마을은 봉화의 전통마을 중에서 옛 모습이 가장 많이 남아있다.

역사문화의 성지 봉성면

조선시대에 유교를 널리 알리기 위해 중앙의 성균관과 연계해 지방에 향교를 세웠다. 향교는 선현들에게 제례를 올리고 학문을 수련하기 위해 세운 공립학교인 셈이다. 봉화향교는 세종 때 건립됐고 선조 12년(1579)에 봉화현감 월천 조목이 중건했다. 유교문, 누각, 명륜당, 내삼문, 대성전이 있다. 명륜당 전면에는 동재와 서재를 뒀고, 대성전에 제사를 지내는 전사청이 있다. 조선시대에 공자를 존칭해 부른 문선왕을 비롯해 우리나라와 중국의 역대 성현 27위를 모시고 있다. 공자를 모신 사당에 지내는 제사인 석전대제는 1년에 한 번 공자가 태어난 음력 8월 27일 거행한다.

자연석 바위에 불상을 얹은 석조여래입상

자연석 바위에 불상을 얹은 석조여래입상

봉성리에 들어서 이정표를 따라 꼬불꼬불 외길을 따라가다 보면 사과밭이 펼쳐진 길가에서 느닷없이 석조 불상이 나온다. 봉성리 석조여래입상은 거대한 자연석 바위에 불상의 몸체를 조각하고 머리는 다른 바위에 조각해 얹어놨다. 머리 높이만 127㎝이고 전체 높이는 378㎝다. 몸체에 비해 큰 얼굴은 초승달처럼 둥근 눈썹에 웃는 표정을 짓고 있다.

우곡리 문수산 중턱의 천주교 우곡성지에는 조선 정조 때 실학자 농은 홍유한의 묘가 있다. 실학자 성호 이익에게 학문을 배우다가 조선에 천주교가 전파되기 전에 서학 <천주실의> <칠극> 등을 통해 교리를 깨닫고 신앙생활을 시작했다. 그의 후손들과 천주교 신자가 뜻을 모아 성지로 조성한 우곡성지는 현재 프랑스 신부가 거주하고 있으며 천주교 신자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고 있다.

금강소나무의 기상이 담긴 춘양면

문재 권벌을 추모하기 위한 정자 한수정

문재 권벌을 추모하기 위한 정자 한수정

의양리에 있는 한수정은 조선 중종 때 문신인 충재 권벌을 추모하기 위해 선조 41년(1608) 그의 손자 석천 권래가 세운 정자다. 원래 충재가 세운 거연헌(居然軒)이 있었으나 화재로 무너지자 그 자리에 정자를 세웠다. ‘찬물과 같이 맑은 정신으로 공부하는 정자’라는 의미로 한수정이라고 이름 지었다. 오랜 세월의 흔적이 그대로 묻어 있는 정자는 와룡연이라는 연못이 감싸고 있다. 초연대라는 넓은 바위가 있고, 400여 년 된 회나무가 그늘을 드리운다.

한수정에서 마을 안쪽으로 들어가면 조선 후기 중추원 의관과 도산서원장을 지냈던 만산 강용이 고종 15년(1878)에 건립한 만산고택이 있다. 고택은 11칸 규모의 긴 행랑채가 있고 가운데 솟을대문이 우뚝 솟아있다. 대문을 들어서면 정원이 아름다운 사랑 마당이 넓게 펼쳐진다. 왼쪽에 서실을 뒀고 오른쪽에 별당인 칠류헌(七柳軒)이 있다. 만산고택의 자랑은 편액이 많다는 것인데, 사랑채에는 강용이 태어났을 때 흥선대원군이 만산이라는 호를 지어주고 직접 쓴 ‘만산(晩山)’이라는 현판이 걸려있다. ‘존양재(存養齋)’는 3·1운동을 이끈 민족대표 33인 중 한 명인 오세창 선생의 글씨다. 서실의 현판 ‘글로 맺은 좋은 인연’이란 뜻의 ‘한묵청연(翰墨淸緣)’이란 글씨는 고종의 아들 영친왕이 8세 때 썼다고 한다. 최고의 목재인 금강송, 춘양목을 사용해 오랜 세월이 지난 지금도 여전히 소나무의 기상처럼 변함없이 당당하다.

서동리에 있는 동·서삼층석탑은 한국산림과학고 운동장에 있다. 학교 마당에 보물이 있다는 게 의아했지만 이곳은 원래 신라 고찰이던 남화사 터였다. 동탑 서탑의 쌍탑으로 세워진 삼층석탑은 상하 이중기단 위에 삼층 탑신을 얹은 보편적인 신라 석탑이다. 9세기 통일신라시대에 건립된 것으로 추정된다. 1962년 해체해 복원할 당시 서탑에는 사리함을 넣었던 사리공만 남아있었고 동탑에서 사리병과 99개의 작은 토탑(土塔)이 발견돼 경주국립박물관에 보관하고 있다.

봉화=글·사진 이솔 여행작가 leesoltour@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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