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악관에서 속기사로 근무할 당시의 저자(뒷줄 왼쪽 세 번째).  /한경BP
백악관에서 속기사로 근무할 당시의 저자(뒷줄 왼쪽 세 번째). /한경BP
아르바이트를 전전하며 살아가던 한 백수가 수십 군데 회사에 지원하지만 매번 낙방한다. 어느날 타이핑 직원을 구한다는 회사에 우연히 지원해 합격한다. 알고 보니 그 직업이란 게 미국 백악관에서 현직 대통령의 말을 기록하는 속기사였다면 기분이 어떨까. 영화나 소설에 나올 법한 이 이야기는 미국에서 실제 있었던 일이다.

[책마을] 평범한 취준생, 대통령 속기사 되다…솔직 발랄한 '백악관 생활기'
《백악관 속기사는 핑크 슈즈를 신는다》는 한 젊은 직원의 눈으로 바라본 버락 오바마 전 대통령의 백악관으로 독자들을 안내한다. 저자인 벡 도리-스타인은 2012년 우연히 본 구인공고에 지원해 5년 동안 백악관에서 오바마 대통령의 속기사로 일한 여성이다. 워싱턴DC에서 기간제 교사를 하며 아웃사이더로 살던 그는 하루아침에 대통령 바로 옆에서 늘 동행하면서 미국을 이끄는 엘리트 집단과 매일 함께 생활하는 삶을 살게 된다.

저자는 2012년 백악관에 들어간 날부터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이 취임한 날까지 5년 동안 오바마 대통령과 세계를 누비며 만났던 동료와 사람들을 세밀하게 그려냈다. 미국 드라마 ‘하우스 오브 카드’에서 그리듯이 백악관 하면 정치적 암투와 공작, 검은 음모와 계략, 엄숙하고 무거운 분위기가 떠오른다.

저자가 그려낸 백악관에는 비밀리에 이뤄지는 속임수와 술수는 등장하지 않는다. 책 제목에서 드러나듯 저자는 주변 눈초리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핑크 신발을 신고 자기 방식으로 묵묵히 일하면서 주변 사람들과 우정을 쌓는다.

백악관은 예상치 못한 사랑이 싹트고 연인이 됐다가 헤어지는 일상적인 로맨스 장소가 된다. 취직 전 만났던 백수 애인과 취직 후 직장 동료 사이에서 방황하는 주인공의 이야기는 어떤 연애소설보다 흥미진진하다. 비현실적일 정도로 평범하고 따뜻한 그곳 풍경을 저자는 때론 유머 넘치게 때론 거침없는 입담으로 풀어낸다.

오바마 전 대통령의 개인적인 모습도 책을 통해 고스란히 드러난다. 헬스장에서 러닝머신을 뛰고 있는 저자에게 “그거보단 더 빨리 달릴 수 있을 텐데”라며 누군가 말을 건넨다. 돌아보니 야구모자에 평범한 검정 티셔츠를 입고 있는 오바마 대통령이다. 저자는 대통령 앞에서 땀냄새를 감추려고 애쓰지만 오바마는 아무렇지도 않게 러닝머신에 올라 스포츠 채널을 넘긴다.

저자는 오전 5시 알람을 오후 5시로 잘못 맞춰 대통령 자동차 행렬이 출발하는 일정을 놓칠 뻔하기도 했다. 그는 약간의 문자메시지 실수만 발생해도 백악관 팀 전체에 낭패를 초래할 수도 있어 항상 긴장감을 유지해야 하는 삶을 살았다고 회상한다.

5년 동안 저자가 겪은 꿈같은 이야기는 사실 장소만 특별한 곳이었을 뿐이지 실망과 상처를 딛고 성장해가는 한 인간의 성장 드라마다. 요란한 정치 한복판에서 그의 눈은 대부분 위를 향하고 있었지만 동시에 동료와 주위의 눈에 잘 띄지 않는 사람들도 놓치지 않고 애정어린 시선으로 그려낸다. 솔직 발랄하게 풀어낸 저자의 백악관 이야기를 따라가다 보면 어느새 오바마 정부에서 벌어졌던 사건들과 역사의 흐름까지 생생하게 접하게 된다.

은정진 기자 silver@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