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etty Images Ban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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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프스 산자락 인스브루크, 色다른 세상을 만나다
오스트리아 서부 티롤주의 주도 인스브루크. 도시명의 첫 글자인 ‘인(Inn)’은 강 이름, 뒷 ‘브루크(bruck)’는 다리라는 뜻으로 ‘인 강 위에 있는 다리’라는 뜻을 지녔다. 유럽에서 알프스산맥이 있는 도시 가운데 가장 큰 도시이며, 빈, 그라츠, 린츠 그리고 잘츠부르크에 이어 오스트리아에서 다섯 번째로 큰 도시다. 지형적으로 동으로는 오스트리아, 서로는 스위스, 남으로는 이탈리아, 북으로는 독일과 인접해 있는 교통 요충지였기 때문에 주변 국가들이 호시탐탐 약탈의 기회를 꿈꿨던 곳이다. 새하얀 알프스의 청정 자연에 둘러싸인 인스브루크의 모습은 곱디곱게 자란 소녀 혹은 소년과 같이 맑고 순수했다. 이 도시가 한때 핏빛 전쟁의 소용돌이 속에서 온갖 파란을 겪을 대로 겪은 곳이라는 것을 유추할 수 있는 요소는 찾아보기 힘들다. 혹자는 마리아 테레지아 거리와 황금 지붕 등을 언급할 테지만, 그 또한 ‘현재’의 모습만으로는 파란만장한 핏빛 역사를 떠올리기는 어렵다.

200년 전 전투 역사 기록한 티롤박물관

‘타임 슬립(Time Slip)’이라는 단어를 아는가? 타임머신과 같은 기계의 힘을 빌리지 않고, 자기도 모르는 사이 다른 시간으로 미끄러져 들어가는 현상을 지칭하는 말이다. 장소는 그대로인데 과거나 미래 등 시간 변화만 경험하게 되는 기이한 현상, 물론 과학적으로 증명된 것은 아무것도 없다. 타임 슬립, 지금부터 오스트리아의 한 도시인 인스브루크에서 필자가 실제로 겪었던 신기한 경험을 이야기하려 한다.
200여 년 전 벌어진 전투를 기록해 놓은 티롤 박물관. 또 다른 인스브루크를 만날 수 있다. 티롤 박물관 제공
200여 년 전 벌어진 전투를 기록해 놓은 티롤 박물관. 또 다른 인스브루크를 만날 수 있다. 티롤 박물관 제공
인스브루크를 깊이 있기 이해하기 위해서는 200여 년 전의 전투를 낱낱이 기록해놓은 ‘티롤 박물관’으로 향할 것을 추천한다. 평소 같으면 지루해했을 역사박물관에 불과했지만 이번은 왠지 기대가 됐다. 순수의 이면, 또 다른 인스브루크를 만날 수 있다는 생각에 두근두근 설레기까지 한다.

입구를 지나 긴 통로를 지나자 커다란 홀이 맞이한다. “와!”하는 탄성이 절로 튀어나온다. 커다란 원형의 홀 벽을 따라 360도로 이어진 거대하고도 거대한 원형 회화의 한가운데로 발을 들여놓은 순간이다. 귓가엔 군중들의 커다란 함성 소리가 울리고, 눈앞에는 총칼로 무장한 병사들이 몰려오고 있다. 등 뒤에는 적들을 막아내는 티롤리언(현재 인스브루크가 속한 티롤 지역에 사는 사람들을 부르는 말)들이 비장한 방어선을 구축하고 있고, 난 그들 사이에 우두커니 서 있다. 대포 연기에 눈앞이 점점 희미해진다. 아슬아슬하게 내 옆을 스쳐 지나간 총알들은 사정없이 나무를 관통하고, 그 나무 파편이 여기저기에 흩어진다. 발아래엔 붉은 피를 흘리며 구원의 손길을 내미는 처절한 노인이 달려든다. ‘어떻게 해야 하지?’ 온갖 화약 냄새와 연기로 진동하는 전장, 어서 이곳에서 도망쳐야겠다는 생각만 들 뿐이다.

“이제 그만 가자!”

아내가 부르는 소리에 퍼뜩 정신을 차려보니 함성 소리도, 대포 소리도 사라지고 없다. 고요한 박물관엔 바람 소리조차 들리지 않는다. 주위를 둘러보니 다른 사람도 무언가에 홀려 있는 듯하다. 사방을 둘러싼 어마어마한 크기의 티롤 파노라마 회화는 나를 포함한 방문객 모두를 전투가 벌어지고 있는 200년 전 전장의 한가운데로 이끄는 묘한 힘을 지니고 있다. 진짜 타임 슬립을 한 것처럼 생생한 힘이고, 기이한 경험이다.

홀을 빠져나온 후 가이드가 던진 놀라운 한마디. “지금 여러분이 서 계신 이곳 베르지젤 언덕이 저 회화 속 그때 그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던 바로 그 자리입니다.”

수만 캐럿의 크리스털 스와로브스키 박물관

스와로브스키 크리스탈 뮤지엄
스와로브스키 크리스탈 뮤지엄
인스브루크 시내에서 10여㎞ 떨어진 바텐스 지역에 오스트리아를 대표하는 브랜드인 스와로브스키 박물관이 있다. 1995년에 스와로브스키 창사 100주년을 기념해 개관 후 예술로 승화된 크리스털을 보기 위해 전 세계 곳곳에서 사람들이 모여드는 곳이다. 박물관 내 모든 설치물을 크리스털로 장식한 것으로 유명하며, 전시관별 독특한 테마로 구성돼 있다.

그 남자와의 결혼식 당시 예물은커녕 커플링 하나 맞추지 않고도 전혀 섭섭하지 않았었기에 난 스스로가 보석에 눈곱만큼의 관심도 없는 줄 알았다. 하지만 스와로브스키 크리스털 월드에 들어서자 두눈이 휘둥그레질 정도로 반짝이는 수천수만 캐럿의 크리스털이 보이자 그 황홀함에 빠져 연신 감탄과 찬양을 내뿜을 수밖에 없었다. 스와로브스키 크리스털 월드를 구경한 후 시내로 돌아오는 길, 막상 반짝이는 크리스털을 하나 쥐어 보지도 못하고 돌아서야만 하는 가난한 여행자의 주머니 사정이 떠올라 괜스레 의기소침해졌다.

다행스럽게도 이럴 때면 나보다 더 내 기분을 잘 헤아리는 세심한 남편이 항상 옆에 있곤 했다. “우리 잠깐 저기에 들렀다 갈까?” 그가 손을 뻗어 가리킨 곳엔 거꾸로집이 있었다. 그러니까 하늘을 향해 있어야 할 빨간 지붕이 땅바닥에 반쯤 처박혀 있고, 대문도 창문도 모두 거꾸로 달려있는 집. 지난밤 안내 책자를 보고 지나가는 말로 “여기 가보고 싶지 않아?”라고 툭 던졌던 걸 기억하고 온 것이었다.

모든 것이 천장에 매달려 있는 거꾸로집

대문을 열고 집 안으로 들어서자 거실도, 부엌도, 화장실도, 침실도 온통 거꾸로. 식탁도, 침대도, 변기도, 인형도, 장난감도 모두 천장에 거꾸로 매달려 있었다. 심지어 차고의 자동차마저 거꾸로였다. 그게 뭐 대수라고 다 큰 어른이 설레발이냐 싶겠지만 머릿속으로만 하는 상상과 눈앞에 벌어지고 있는 실제는 엄연히 달랐다. 꿈속 혹은 만화 속에서나 일어날 수 있는 일 아닌가? 마룻바닥이어야 하는 곳에 천장이 있었고, 거꾸로 된(사실은 그림만 거꾸로 그려진) 계단을 걷자니 나도 모르게 비틀비틀 휘청거리더란 말이다. “아니야, 좀 더 진짜처럼 매달려 봐”, “응, 그렇게! 그렇게!”, “발을 바닥에서 떼야 진짜 매달린 거 같지”라며 우리는 아이 마냥 낄낄거리며 부산스럽게 온 집 안을 헤집고 다녔다. 한 장의 완벽한 거꾸로 사진을 찍기 위해 매달리고 매달리고 또 매달리기를 반복하며 참 신나게도 놀았다. 30분이 지나고, 1시간이 지나고, 2시간이 지나 해가 붉어질 때가 돼서야 정신이 번쩍 들었다.
모든 것이 천장에 매달려 있는 거꾸로집에선 신기하고 재미있는 여행사진을 남길 수 있다.
모든 것이 천장에 매달려 있는 거꾸로집에선 신기하고 재미있는 여행사진을 남길 수 있다.
우리는 예약해 놓은 공연 시간에 늦을세라 부랴부랴 다시 인스브루크로 향했다. “오랜만에 진짜 최고로 재밌었어!” 난 언제 우울했었냐는 듯 돌아오는 차 안에서 연신 재밌다고 함박웃음을 띠며 얘기했다. 내 기분을 풀어주기 위해 그곳에 간 줄 알았지만 실제로는 그 남자가 더 신나게 잘 놀았다는 후문.

◀오스트리아에서 다섯 번째로 큰 도시 인스브루크의 거꾸로 집. 눈속임에 불과하지만 은근히 재미있다.
◀오스트리아에서 다섯 번째로 큰 도시 인스브루크의 거꾸로 집. 눈속임에 불과하지만 은근히 재미있다.
‘눈은 호강했지만 결론적으로 손에는 쥘 수 없었던 스와로브스키 크리스털 월드에서의 허무함 vs 사랑하는 사람의 눈을 마주보며 마음껏 웃고 즐기며 남긴 사진 한 장의 만족감.’ 어쩌면 내가 경험한 것 중 가장 보잘것없고 소소했던 거꾸로 집 체험이 내게는 그 어느 때보다 인상적이었던 일로 기억된 것처럼 말이다.

여행 메모

인스브루크는 잘츠부르크에서 남서쪽으로 140㎞, 빈에서는 약 470㎞ 정도 떨어져 있다. 빈에서 인스브루크까지는 기차로 약 4시간30분이 걸린다. 인스브루크 구석구석을 여행할 계획이라면 인스브루크 카드를 적극 추천한다. 인스브루크의 대중교통은 물론 유명 관광지 대부분을 무료로 입장할 수 있으며 24시간, 48시간, 72시간권 등으로 구매할 수 있다. 시차는 한국보다 8시간 늦다. (서머타임 적용 시 7시간)

인스브루크=글 정민아 여행작가 jma7179@naver.com / 글·사진 오재철 여행작가 nixboy99@daum.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