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초 소수서원과 퇴계 모신 도산서원 등 경북·대구 5곳
세계유산 '한국의 서원' 9곳, 역사와 특징은①
한국의 14번째 세계유산이 된 '한국의 서원'(Seowon, Korean Neo-Confucian Academies)은 성리학에 근거해 학자를 양성하고 스승을 섬긴 곳이라는 공통점이 있지만, 9곳이 지닌 역사와 특징 모두 다르다.

문화재청과 한국의 서원 통합보존관리단 자료를 바탕으로 서원별 특징을 정리했다.

경상북도와 대구에는 세계유산에 등재된 서원이 5곳 있다.

◇ 영주 소수서원
경북 영주시 순흥면 소백산 자락에 있는 소수서원(紹修書院)은 한국 서원 역사가 시작된 곳이다.

1541년 풍기군수로 부임한 주세붕(1495∼1554)이 이듬해 고려 후기에 성리학을 도입한 인물인 안향(1243∼1306) 사묘를 지었고, 1543년 '백운동서원'(白雲洞書院)이라는 명칭으로 서원을 건립했다.

서원 자리는 본래 숙수사라는 절이 있던 곳으로, 안향이 공부한 장소라고도 전한다.

주세붕은 안향에 이어 고려시대 문신 안축과 안보를 추가로 배향했고, 명종이 1550년 풍기군수였던 퇴계 이황 요청을 받아 '소수서원' 현판을 내리면서 명칭이 변경됐다.

주세붕은 1633년 배향됐다.

조선 첫 서원인 소수서원은 교육과 제향에 관한 운영 규정을 처음으로 만들었다.

예컨대 강의 횟수, 평가 방식, 입학 관련 사항, 제향 절차, 제향 참여자 역할 등을 정했다.

건물 배치는 전형적 서원 구조를 따르지 않아 자유로운 편이다.

하지만 교육 공간인 강당, 사당인 사우(祠宇), 기숙사인 재사를 갖춘 점은 후대 서원과 같다.

건물은 17세기 이후 지속해서 수리하고 재건했다.

1963년 서원 가운데 국가지정문화재 사적으로 가장 먼저 지정됐다.

사당인 문성공묘(文成公廟)와 강론 장소인 강학당(講學堂)이 2004년 각각 보물이 됐다.

숙수사지 당간지주도 보물이다.

서원 옆에 박물관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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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안동 도산서원
도산서원(陶山書院)은 퇴계 이황(1501∼1570)이 제자를 가르치기 위해 1560년 세운 도산서당을 모태로 한다.

이황이 세상을 떠나고 4년이 지난 1574년 안동과 예안 사림이 건립했으며, 지금도 강학 공간 전면에 도산서당이 있다.

선조는 1575년 석봉 한호가 쓴 글씨를 사액했다.

조선에 성리학이 정착하고 서원이 퍼지는 데 결정적 공헌을 한 이황을 배향한 도산서원은 경상북도뿐만 아니라 한국을 대표하는 서원 중 하나로 꼽힌다.

역사적으로도 학문 혹은 학파를 이룬 전형적 서원이고, 지역사회에 정치적·사회적 영향력을 강하게 미쳤다.

토론을 중심으로 한 강학 활동을 펼쳐 통일된 의견을 내기도 했고, 여러 차례 이황 저술을 출판했다.

정조는 1792년 죽은 신하를 제사 지내는 치제(致祭)를 내렸고, 그해 치른 도산별과에는 유생 7천여 명이 응시했다.

1796년에는 강 건너편에 시사단(試士壇)을 조성했다.

도산서원의 또 다른 특징은 입지다.

강과 평야가 보이는 곳에 있어 자연친화적인 느낌을 준다.

주변 풍경이 아름다워 자주 회화나 문학 작품 소재가 됐는데, 보물 제522호 '강세황필 도산서원도'는 1751년에 완성한 그림이다.

도산서원 관련 시문은 3천여 건이 전한다.

건축물은 전반적으로 간결하고 검소한 편이다.

소수서원처럼 교육 장소인 전교당(典敎堂)과 퇴계 신주를 모신 상덕사(尙德祠)가 각각 보물로 지정됐다.

옥진각(玉振閣)은 퇴계 유물 전시관이다.

서원이 소장한 고서와 고문서, 목판은 안동 한국국학진흥원이 관리 중이다.

세계유산 '한국의 서원' 9곳, 역사와 특징은①
◇ 안동 병산서원
도산서원 앞을 흐르는 강은 병산서원(屛山書院)도 지난다.

병산서원은 해발 328m 화산(花山) 아래에 있다.

하회마을과 직선거리가 3㎞이며, 2010년 세계유산에 등재된 '한국의 역사마을: 하회와 양동' 중 일부다.

'하회'는 하회마을과 병산서원으로 구성된다.

임진왜란이 일어난 1592년 영의정 자리에 오른 풍산류씨 서애 류성룡(1542∼1607)이 1575년에 가문 교육기구로 지은 풍악서당 자리에 1613년 지역 사림들이 세웠다.

사액 시점은 철종 14년인 1863년이다.

서원에는 류성룡 아들인 류진 신위도 있으며, 하회마을 충효당(忠孝堂)은 류성룡 종택이다.

병산서원은 정면 7칸, 측면 2칸 누마루인 만대루(晩對樓)에서 바라보는 풍경이 수려하기로 유명하다.

한국 서원이 간직한 경관적 요소를 잘 드러내는 건축물이다.

만대루라는 명칭은 당나라 시인 두보(杜甫)가 지은 시에 나오는 문구 '취병의만대'(翠屛宜晩對)에서 따왔다고 한다.

이 글귀는 '푸른 절벽은 오후 늦게 대할 만하다'를 뜻한다.

만대루는 유생들이 시모임을 하거나, 각종 현안을 논의하던 곳이다.

병산서원은 서원이 지역 공론장이었음을 입증한다.

수천 명이 연명한 상소인 유소(儒疏)를 처음 올린 곳이라고 전하며, 공론을 소통한 문서인 통문이 남았다.

강당 뒤편에 있는 사우는 강당과 직선을 이루지 않고 동쪽으로 약간 틀어졌는데, 이러한 배치는 도산서원과 흡사하다.

장서와 책판은 한국국학진흥원에 있으며, 목판은 2015년 세계기록유산 '한국의 유교책판'에 등재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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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주 옥산서원
경주 안강읍 옥산서원(玉山書院)은 병산서원과 유사한 점이 여럿 있다.

2010년 양동마을, 동강서원, 독락당 등과 함께 세계유산 '한국의 역사마을: 하회와 양동'에 등재됐고, 만대루 같은 누마루인 무변루(無邊樓)가 있다.

무변루는 서원 건축에 누마루를 도입한 첫 사례다.

경상도 동부 서원과 사림 사이에서 공론을 주도한 곳이기도 하다.

1572년에 창건한 옥산서원은 양동마을에서 태어난 조선 중기 문신 회재 이언적(1491∼1553)을 배향했다.

이언적은 존재론과 우주론 같은 성리학 이론을 탐구하고, 이에 대한 토론을 주도했다.

이조판서와 경상도 관찰사를 지냈고, 많은 저술을 남겼다.

선조는 1573년 '옥산'(玉山) 글씨를 사액했다.

정문인 역락문, 무변루, 체인문, 체인묘가 도산서원이나 병산서원과 달리 일직선상에 있다.

무변루는 만대루처럼 정면 7칸, 측면 2칸에 맞배지붕을 얹었다.

가운데 3칸은 대청이고, 그 옆에는 각각 1칸짜리 온돌방이 있다.

당대 명필로 꼽힌 한호와 추사 김정희가 쓴 편액이 존재한다.

옥산서원에는 고서가 많은데, 그중에는 1573년 경주부에서 찍은 '삼국사기' 완질도 있다.

삼국사기는 지난해 2월 보물에서 국보로 승격됐다.

아울러 입학 규정, 교육 평가 내용과 관련된 고문서와 사림 8천849명이 서명한 만인소도 있다.

의례 과정에서는 지금도 제물을 신성하게 여기고 검사를 엄격하게 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세계유산 '한국의 서원' 9곳, 역사와 특징은①
◇ 달성 도동서원
대구 지역을 대표하는 달성 도동서원(道東書院)은 1605년 정구(1543∼1620)가 주도해 세웠다.

낙동강을 북쪽에 두고 건립해 건물은 대부분 북향이다.

뒤쪽에는 해발 400m가 조금 넘는 대니산이 있다.

김종직 문하에서 학문을 배우고 조광조를 제자로 둔 한훤당 김굉필(1454∼1504)이 주된 배향 인물이다.

김굉필은 성리학 이론 중에서도 실천윤리를 강조했으며, 묘소가 서원 근처에 있다.

정구는 김굉필 외증손인데, 서원 앞에 있는 은행나무를 그가 심었다고 전한다.

1607년 사액을 받았는데, 서원 명칭은 '공자의 도가 동쪽으로 왔다'를 뜻한다.

도동서원 특색은 무엇보다 건축적 요소에 있다.

서원이 사적으로 지정되기 전에 중정당(中正堂)과 사당, 담장이 보물 제350호로 지정됐다.

강당인 중정당은 정면 5칸, 측면 2칸 반 규모다.

기단부에 일반 서원에는 없는 거북과 용 조각이 있는데, 거북은 출입 의미를 부여하고 용은 수해가 나지 않기를 기원하는 용도라고 한다.

강당을 둘러싼 담장도 건축미가 매우 뛰어나다.

문루인 수월루(水月樓)는 1849년 처음 건립했으나, 1888년 화재로 소실돼 1973년 다시 지었다.

도동서원 제향은 제사가 끝난 뒤 술이나 제물을 먹는 음복례(飮福禮)를 엄격하게 시행한다.

엄숙한 분위기에서 제관 모두가 음복례를 해 시간이 오래 걸리는 편이다.

(계속)
/연합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