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포클레스와 민주주의
배철현의 그리스 비극 읽기
(56) 고귀(高貴)
‘유골함을 든 엘렉트라’, 조각가 프리드리히 티크 작(1824년), 독일 베를린 쉰켈박물관 소장.

‘유골함을 든 엘렉트라’, 조각가 프리드리히 티크 작(1824년), 독일 베를린 쉰켈박물관 소장.

물건엔 격(格)이 있다. 어떤 물건이 최고급이라는 평가를 받으려면 어떤 조건을 만족시켜야 할까? 그 물건은 사용하기 편리하고 보기에도 좋고 촉감도 좋을 뿐만 아니라, 다른 물건들과 함께 전체를 구성하는 데 반드시 필요해야 한다. 그런 물건은 조용하지만 빛난다. 우리는 그런 물건에 기꺼이 많은 돈을 지불한다. 그러나 허접한 물건은 겉모습만 화려하고 요란하다. 그것은 사용자에게 불편을 느끼게 하고 일정 시간이 지나면 곧 망가진다. 사람들은 안목이 없거나 돈이 없어 허접한 물건을 구입한다. 인간에게도 격이 있다. 품격(品格)이다. 우리는 세상 기준으로는 계산할 수 없고 말로도 표현할 수 없는 가치를 품격이라고 부른다. 품격은 인간이라면 갖춰야 할 교양이다. 교양은 멘토의 끊임없는 가르침과 더 나은 자신을 위한 연습을 통해 학습자의 몸에 서서히 배는 아우라다.

품격

남들이 부러워하는 가문이나 학벌을 지녔다고 교양이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런 부류의 사람들은 자신을 계발하는 데 소홀하고 자신이 아는 세계를 자만하기 때문에 오히려 더 ‘무식’하다.

배움은 물과 같이 끊임없이 바다로 흘러들어가야 한다. 교양은 책 몇 백 권을 완독한다고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고전과 경전이 말하는 가치들에 공감해 어제의 나를 허물고 미래의 나를 구축하기 위해 연습하고, 실생활에서 행동으로 드러나게 해야 한다. 사람은 교양을 쌓을수록 모르는 분야를 기하급수적으로 발견한다. 학문의 완성은 언제나 겸손에서 비롯된다.

《안네의 일기》

《안네의 일기》(1942~1944년)의 일부분.

《안네의 일기》(1942~1944년)의 일부분.

안네 프랑크(1929~1945)는 제2차 세계대전 중 나치가 네덜란드를 점령한 당시에 일기를 남겼다. 그와 가족은 아버지가 운영하던 식료품 공장 창고와 사무실에 마련한 비밀 방에서 숨어 지냈다. 안타깝게도 누군가의 밀고로 1944년 아우슈비츠로 보내졌다가 1945년 하노버 근처 베르겐벨젠 수용소에서 장티푸스에 걸려 사망했다. 그가 3년간 은신하는 동안 기록한 《안네의 일기》는 한 개인이, 한 소녀가 당시 독일 집단의 지성보다 고귀하다는 사실을 증언한다. 안네는 가공할 만한 나치의 폭력 앞에서도 자신의 고귀함을 잃지 않고 역설적으로 즐겁게 인내한다. 그는 자신과 가족이 경험하고 있는 무자비한 공포 앞에서 일상생활, 행복, 그리고 삶의 의미에 대해 깊이 묵상하고 일기로 남겼다.

안네는 일기 마지막 부분에서 자신이 고귀함을 지킬 수 있는 이유를 다음과 같이 말한다. “내가 모든 이상(理想)을 아직도 버리지 않았다니 놀랍다! 이상들은 너무 터무니없어 보이고 비현실적이기 때문이지. 그러나 나는 이상들에 매달리겠어. 왜냐하면 모든 상황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의 마음은 진실로 고귀하다고 믿기 때문이야. 세상이 천천히 황무지로 변해가고 있어. 언젠가 우리를 말살시킬 천둥소리가 들려. 나는 수백만 명의 고통을 느껴. 그러나 고개를 들어 하늘을 보면서 모든 것이 좋게 변할 것이라고 믿어. 이 학살도 곧 끝나, 평화와 평안이 돌아오겠지. 나는 그 기간 동안 내 이상들을 소중하게 생각하고 지킬 거야.”

인생의 힘든 시절은 우리에게 소중한 가치들을 버리라고 유혹한다. 만일 우리가 안네와 같은 용기를 갖고 있다면 이런 환경이 아니라 이 가치가 요구하는 원칙이 우리를 인도하도록 허용할 것이다.

어머니와 딸의 대화

환경이 아니라 고귀한 원칙을 지닌 두 여인이 대화한다. 어머니 클리템네스트라와 딸 엘렉트라다. 둘은 아가멤논의 무덤에서 만난다. 왕비인 어머니는 자신의 안녕을 위해 남편 아가멤논을 살해했다. 이제 그의 무덤에 찾아와 제사를 지낼 참이다. 그래야 아르고스 시민들이 그를 통치자로 인정해줄 것이기 때문이다. 그는 딸 엘렉트라가 자신을 저주하고 다닌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클리템네스트라는 아이기스토스가 곁에 없다는 사실을 안 엘렉트라가 더욱 심한 험담을 하고 있다고 불평한다.

클리템네스트라는 아가멤논을 죽인 자는 자신이 아니라고 항변한다. 정의의 여신이 살해하라고 명령했고, 자신은 그 명령에 순종한 것뿐이라고 한다. 정의의 여신이 남편을 살해하라는 명령을 내린 이유는 아가멤논이 이전에 저지른 치명적인 실수 때문이다. 아가멤논은 트로이 항해와 원정을 위해 딸 이피게니아를 제물로 바쳤다. 클리템네스트라는 그런 매정한 아버지는 살해당해 마땅하다고 생각한다.

엘렉트라는 다르게 생각한다. 자신의 남편을 살해하는 행위는 옳고 그름을 떠나 수치스러운 일이라고 여긴다. 어머니의 살인 행위는 정당하지 않다. 이뿐만 아니라 어머니가 남편을 죽일 때 도와준 공범자와 동침해 그의 자식을 낳고, 자신과 같은 전남편의 자식들을 추방한 행위는 반인륜적이다. 엘렉트라는 어머니에게 이렇게 말한다. “나에게 당신은 어머니가 아니라 안주인입니다. 나는 비참하게 살아가며 당신과 당신의 정부에 의해 심한 고통을 받아왔어요. 가련한 오레스테스는 당신의 손에서 겨우 벗어나 망명자로 비참하게 떠돌고 있어요.”(597~602행) 클리템네스트라는 자신이 어머니라는 것을 인정하지 않는 엘렉트라의 말에 화가 난다. 아이기스토스가 돌아오면, 그 대가를 치를 것이라고 협박한다.

‘오레스테스 가정교사’ 필라테스의 등장

필라테스는 오레스테스의 부탁을 받고 아르고스로 찾아왔다. 그는 왕비에게 좋은 소식을 가져왔다고 말한다. 필라테스의 얼굴을 기억하지 못하는 클리템네스트라는 누가 그를 보냈는지 묻는다. 그는 포크스 사람 파노테우스가 자신을 보냈다고 말한다. 파노테우스는 클리템네스트라와 아이기스토스의 가장 친한 친구다. 필라테스는 그녀의 환심을 사기 위해 거짓말을 지어내 오레스테스가 죽었다고 말한다. 엘렉트라는 하늘이 무너지는 듯한 슬픔을 감추지 못한다. “아아, 가련한 내 신세! 오늘로 나는 망했다!”(674행)고 애통해 한다.

클리템네스트라는 자신에게서 도망쳐 호시탐탐 자신의 목숨을 노리던 오레스테스가 어떻게 죽었는지 자세히 설명해달라고 한다. 필라테스는 오레스테스가 그리스인들의 올림픽 경기에 참가했다고 말한다. 오레스테스는 심판들이 공지한 다양한 경기에서 우승했다. 달리기, 갑절달리기(중거리), 그리고 5종경기에서 월계수를 받았다. 전령은 우승자를 “아르고스인으로 이름은 오레스테스이며, 전에 헬라스의 유명한 군대를 모았던 아가멤논의 아들이다”(692~695행)고 호명했다. 그러나 전차를 모는 경기에 무리하게 참가한 게 실수였다. 오레스테스는 경기 도중 전차에서 떨어졌고 말고삐에 몸이 엉켜 죽었다. 오레스테스의 친구들은 얼굴을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피투성이가 된 그의 시신을 수습해 서둘러 장작더미를 쌓아 화장했다고 전했다. 필라테스는 오레스테스의 유골을 청동단지에 담아 클리템네스트라 앞에 들고 왔다. 클리템네스트라는 이 소식을 듣고 “끔찍하지만 유익하다”(767행)고 한숨 지으며 말한다.

남편 무덤에서 딸을 만난 어머니…"나의 행동은 정당했다"

엘렉트라는 동생 오레스테스가 아르고스로 돌아와 천륜을 어긴 어머니와 정부를 처단하고 아르고스의 왕권을 되찾기를 기원했다. 하지만 이제 그런 바람은 물거품이 됐다. 그는 합창단과 주고받는 노래에서 이렇게 말한다. “너는 아직 내게 남아 있던 한가닥 희망마저 내 가슴에서 앗아가 버렸구나. 언젠가 네가 살아 돌아와 아버지의, 그리고 불쌍한 두 누이의 원수를 갚아달라고 기원했다. 나는 이제 어디로 가지?”(809~812행)

엘렉트라는 오레스테스가 아버지로부터 고귀함을 물려받았다고 말한다. 그는 동생 크뤼소테미스와 함께 언젠가 아르고스에서 추방당하거나 살해당할지 모른다는 절망적인 상황에서도 이상(理想)을 꿈꾸며 기다려왔다. 고귀한 오레스테스가 돌아와 자신들뿐만 아니라 아르고스를 구원하길 염원했다. 그러나 필라테스의 소식은 절망적이다. 엘렉트라와 크뤼소테미스에게 희망이 있는가? 이들에게 기적이 일어날 것인가?

배철현 < 작가 ·고전문헌학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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