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의 향기

에게해서 지중해까지, 터키 남서부로의 여행
해안을 따라 대형 리조트가 즐비한 에게해의 휴양지 쿠사다시의 풍경.

해안을 따라 대형 리조트가 즐비한 에게해의 휴양지 쿠사다시의 풍경.

터키와 그리스 사이에는 에게해와 지중해가 출렁인다. 에게해 연안에는 에페소스, 쉬린제, 쿠사다시 등 고대 그리스 문화를 품은 도시가 점점이 흩어져 있다. 해안선을 따라 고대 도시의 자취를 쫓아가다 보면 남부 지중해에 닿는다. 클레오파트라도 다녀간 카푸타스 해변과 페르가몬 왕국의 영화가 깃든 안탈리아가 햇살처럼 환한 모습으로 반긴다.

고대 도시 에페소스 가는 길

에페소스 특산물인 석류를 이용해 주스를 만드는 현지인.

에페소스 특산물인 석류를 이용해 주스를 만드는 현지인.

“유럽에서 가장 완벽한 고대 도시라 불리는 곳이 어딘 줄 아세요? 우리가 갈 에페소스(Ephesos)예요. 가는 길에 쉬린제 마을에 들러 점심부터 먹고 갈게요.” 한국어가 유창한 터키 가이드 네셰가 말했다. 그녀의 말마따나 에페소스는 터키에서 고대 유적이 가장 잘 보존된 도시다. 워낙 유물이 많아 발굴은 현재진행형이지만, 2015년에는 유네스코 문화유산으로 등재됐다.

터키어로 ‘즐거움’이란 뜻의 쉬린제는 동화에서 툭 튀어나온 듯 작고 예쁜 마을이었다. 산비탈을 따라 난 좁은 골목 안에 와인 가게, 올리브 가게 등이 사이좋게 모여 있었다. 대부분 흰 회벽에 주황색 기와 지붕을 올린 그리스풍 건물들이다. 15세기 무렵 에페소스에 거주하던 그리스인들이 이주해와 조성된 마을인 까닭이다. 그 시절부터 마을 주민들은 와인을 만들었는데, 이 지역에서 많이 나는 석류로 달콤한 와인을 선보이는 게 특징이다. 마을 초입의 노천 레스토랑에 앉자 언덕 위의 마을이 한눈에 들어왔다. 나무 그늘 아래에서 즐기는 점심식사는 뜻밖의 선물 같았다. 올리브와 샐러드, 훈연향이 나는 치킨 케밥을 차례로 맛보는데, 살랑살랑 훈풍이 불어와 손끝을 간질였다.

마침내 고대 도시 앞에 섰다. 네셰는 잰걸음으로 앞서가며 설명을 쉼 없이 쏟아냈다.

“에페소스는 기원전 10세기경 이오니아인들이 만든 도시입니다.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이오니아 왕국 아시죠? 어느 날 안드로클로스(Androclos) 왕자가 아폴로 신전에서 새로운 도시를 세우려면 여행을 떠나라, 멧돼지와 생선이 나는 곳에 도시를 세우라는 신탁을 받았어요. 왕자는 에게해를 건너 지금의 터키인 소아시아로 왔죠. 해안에 여정을 풀고 생선을 구워 먹는데, 멧돼지가 나타났지 뭐예요. 바로 그 자리에 세운 도시가 에페소스랍니다.”

이후 에페소스는 해상 무역과 아르테미스 신전을 찾는 순례자들 덕분에 부를 축적해 로마 다음으로 큰 도시로 성장했다. 그 덕에 고대 로마 도시 필수 요건인 목욕탕, 아고라, 신전, 항구와 연결되는 대로 그리고 원형극장이 있는 도시의 틀을 갖췄다. 여러 문명이 흥망성쇠를 거듭하는 동안 에페소스의 항구에 수많은 배가 드나들었으나, 기원후 4세기 대지진으로 물길은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소아시아 총독이 지은 도서관 기둥만 남아

정면부만 남은 에페소스 켈수스 도서관.

정면부만 남은 에페소스 켈수스 도서관.

지금의 대리석 대로 쿠레테스 웨이(Curetes Way)는 과거 항구와 도시를 잇던 길이다. 길 양쪽에 남아 있는 조각상들은 항구를 기억할까. 잠시 생각에 잠기려는 찰나 네셰가 다시 설명을 시작했다.

“에페소스의 입구는 어퍼 게이트와 로어 게이트 두 곳입니다. 우리는 어퍼게이트에서 시작해 켈수스 도서관(Library of Celsus)을 내려다보며 쿠레테스 웨이를 걸어 로어 게이트로 나갈 거예요. 자, 이제 고대 에페소스인의 시점으로 도시를 탐험해봅시다.”

에페소스인이었다면 먼저 입구 근처 바리우스 욕장(Various Bath)에서 몸부터 씻고 하루를 시작했을 것이다. 그런 다음 열린

광장 어퍼 아고라(Upper Agora)를 지나 5000석 규모의 극장 오데(Odeon)에서 토론에 열을 올렸을지 모르겠다. 그 후엔 조각상이 늘어선 쿠레테스 웨이를 지나 도서관에 갔음이 틀림없다. 정면부만 남은 켈수스 도서관은 2세기 초 소아시아의 총독 켈수스 폴레마이아누스를 기리며 지은 건물이다. 서관의 천장은 사라져 버렸지만 파사드를 괴고 있는 열주들은 약 2000년의 역사를 묵묵히 안고 있었다. 벽감 안에 지혜의 신 소피아(Sophia), 지식의 신 에피스테메(Episteme) 등 여신상이 새겨져 있다. 고대 로마인의 예술혼과 건축미가 잘 드러나는 대목이었다.

발바닥이 새겨진 대리석.

발바닥이 새겨진 대리석.

도서관 옆에 사창가가 있었다는 점은 의외였다. 미성년의 출입 제한을 위해 발 크기를 잰 뒤 일정 크기 이상이 돼야 들어갈 수 있었다고. 대리석 바닥에 남아 있는 발바닥 모양과 하트가 그 증거다. 터키 사람들은 이를 세계 최초의 광고라 해석하기도 한다. 대극장은 고대 로마 극장의 반원형 관람석이 그대로 남아 있었다. 높이 18m에 22개 단으로 이뤄져 가장 높은 곳에 서면 아고라와 도서관으로 이어지는 도로와 건너편 산이 파노라마로 펼쳐졌다. 수용인원은 약 2만5000명. 에페소스 최대 인구로 추정되는 25만 명은 이 극장의 관람객 인원에 10을 곱한 숫자다.

에게해의 푸른 휴양지, 쿠사다시

쉬린제 마을의 노천 레스토랑.

쉬린제 마을의 노천 레스토랑.

에페소스를 갈 때 꼭 거쳐야 하는 도시 쿠사다시는 ‘새들의 섬’이란 뜻을 지닌 휴양지다. 현지인보다 외국인에게 사랑받는 휴양지로, 해안을 따라 대형 리조트가 즐비하다. 1년 내내 크루즈선을 타고 온 관광객들이 밀물처럼 몰려왔다 썰물처럼 빠져나가곤 한다. 쿠사다시에서 페리를 타면 1시간 반 만에 그리스 사모스섬에 닿는다. 그 덕에 그리스에서 배를 타고 건너오는 여행자도 많다.

그저 휴양지라 소개하기에 역사가 깊다. 쿠사다시는 기원전 334년 알렉산더 대왕에 의해 건설됐다. 기원 전 2세기에는 동로마 제국에 편입됐다가 1413년부터 오스만 제국의 영토가 됐다. 지금도 시내에 남아 있는 성과 요새는 그 시절에 세운 건축물이다.

쿠사다시에 도착했을 땐 이미 해가 기울고 있었다. 방에 짐을 풀어놓고 발코니 문을 활짝 열어젖히자 푸른 에게해가 펼쳐졌다. 어두워지기 전에 바닷가의 여유를 느껴보고 싶어 얼른 밖으로 나섰다. 짙푸른 바다에서 바람이 불어왔다. 첨벙. 옆 선베드에 앉아 있던 두 남자가 물에 뛰어들더니, 망망한 바다의 일렁임 속에 앞으로 나아갔다. 나는 석류빛 노을에 물드는 바다를 물끄러미 바라보다 장 그르니에의 책, 《지중해의 영감》을 뒤적였다. 마침 펼친 책의 페이지에는 이런 글귀가 쓰여 있다.

‘이런 풍경 앞에서 우리는 다만 두 눈을 감고 그 풍경을 자기 안에 내장하여 거기서 자양을 얻고 싶은 유혹을 느낄 뿐이다. 이리하여 풍경은 나중에 우리가 그 풍경 없이도 지낼 수 있게 허락해 주리라. 그 풍경이 곧 우리 자신이 될 테니까.’

지중해를 품은 고대 항구도시, 안탈리아

쿠사다시에서 안탈리아로 가는 길, 창 밖엔 온통 코발트빛 물감을 풀어놓은 듯 푸른 바다가 넘실댔다. 문득문득 절벽이 나타날 때면 그 사이에 숨어 있는 황금빛 모래사장이 시선을 끌었다. 그냥 지나치기엔 너무 아름다운 풍경이었다. 잠시 순백의 모래사장이 딸린 아담한 만 앞에 차를 세우고 바람을 쐬기로 했다. 밖으로 나서자 청량한 파도 소리가 귀를 파고들고, 나긋한 바람이 인사를 건네듯 어깨를 스쳤다. 해변에는 사람들이 흰 파라솔 아래에서 한가로운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이때 네셰가 뜻밖의 이야기를 들려줬다.

“여기는 클레오파트라도 해수욕을 하고 간 카푸타스예요. 여기서 수영을 하면 클레오파트라처럼 미인이 된다고 해요.”

깜짝 놀라 진짜냐고 되물었지만, 카푸타스 해변에서 수영하면 미인이 되는지 직접 체험해보지 못한 채 차에 올랐다. 터키 최고의 휴양지로 꼽히는 안탈리아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으니.

안탈리아도 페르가몬과 고대 로마의 흔적이 오롯이 남아 있는 항구도시다. 옛 모습이 잘 보존돼 있는 덕에 구시가가 아름답기로 유명하다. 안탈리아 항구를 둘러싼 성벽도 그 시절의 흔적이다. 고대와 다른 점이 있다면 성벽 위 고지대와 그 아래 항구를 엘리베이터가 잇는 정도랄까. 그것도 시민과 관광객을 위한 무료 엘리베이터다. 로마 하드리아누스 황제가 안탈리아에 왔을 때 지은 승리의 아치는 웅장한 ‘하드리아누스의 문(Hadrian’s Gate)’으로 변모했다. 하드리아누스의 문을 통과하면 구시가 칼레이치(Kaleici)가 시작된다.

“안탈리아의 역사는 헬레니즘 문화를 꽃피운 페르가몬 왕국 시대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당시 전쟁으로 세력을 넓히던 페르가몬의 왕 아탈로스(Atalus) 2세는 신하들에게 ‘지상 천국’을 찾으라고 명령을 내렸어요. 신하들은 왕이 마음에 들어할 도시를 찾아 헤맸죠. 그러다 지중해 옆 아름다운 항구도시를 발견했고, 아탈로스 2세는 여기야말로 지상 천국이라며 ‘아탈로스의 도시’란 뜻의 ‘아탈레이아’라고 명명했답니다. 아탈레이아에서 유래한 이름이 지금의 안탈리아예요.”

언덕을 따라 항구로 내려가자 지상 천국이라는 수식어가 어울릴 법한 항구 풍경이 펼쳐졌다. 지중해를 향해 두 팔을 활짝 벌린 항구를 지나, 칼레이치 끝자락, 칼라알리오을루 공원으로 향했다. 조금씩 위로 오를 때마다 눈앞의 전망이 달라졌다. 정상에 도착하자 시원한 바닷바람이 와락 달려들었다. 탁 트인 전망과 바람을 한참 느끼다 구시가 골목으로 발길을 돌렸다. 미로 같은 골목 안에 아기자기한 앤티크 숍과 기념품 가게가 빼곡했다. 모퉁이를 돌자 한 건물 앞에 빨간 의자가 눈에 띄었다. 의자 옆에는 환영 인사처럼 ‘You are Loved always.’(당신을 늘 사랑했다)라는 글귀가 새겨져 있었다.

터키=글·사진 우지경 여행작가 traveletter@naver.com

여행정보

터키 에페소스나 안탈리아까지는 한국에서 직항이 없다. 터키항공을 타고 이스탄불을 경유해 이즈미르로 가서 안탈리아로 나오는 일정을 잡으면 효율적이다. 이스탄불에서 경유 시간이 6시간 이상 남으면 터키항공이 제공하는 무료 이스탄불 투어까지 즐길 수도 있다. 한편 터키는 한국보다 7시간 느리며 화폐로 리라를 쓴다. 1리라=197.11원(2019년 5월 21일 기준) 언어는 터키어지만 관광지와 레스토랑에서는 영어가 잘 통하는 편이다. 지중해성 기후로, 무더운 여름보다 봄·가을이 여행하기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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