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의 향기

그 남자 그 여자의 여행 (9) 미국 유타주 '더 웨이브'

세상에서 가장 긴 벅스킨 협곡, 투박하게 빚어낸 대자연의 조각품
 미지의 세계로 빨려들어 갈 것 같은 신비한 모습의 더 웨이브는 하루에 딱 20명만 출입을 허용한다.

미지의 세계로 빨려들어 갈 것 같은 신비한 모습의 더 웨이브는 하루에 딱 20명만 출입을 허용한다.

퇴근하듯 이 공터로 돌아온 지도 벌써 나흘이 지났다. 코딱지만 한 마을에 나흘씩이나 머물고 있는 이유는 ‘더 웨이브’라는 관광지 때문이다. 바위로 이뤄진 지층의 모양이 파도 같은 물결 무늬로 이뤄져 있는 환상적인 곳. 윈도 배경 화면에서 만날 수 있는 곳. 하지만 가벼운 마찰에도 부스러지는 사암층으로 이뤄져 있어 하루에 딱 20명에게만 출입이 허락된 곳. 그곳이 바로 ‘더 웨이브’다. 10명은 인터넷을 통해 사전 신청을 받고, 나머지 10명은 매일 오전 9시에 ‘카납’이라는 마을의 인포메이션센터를 직접 방문한 사람을 대상으로 제비뽑기를 해서 결정되는데 경쟁률이 5 대 1에서 10 대 1을 넘나든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웨이브를 방문하기 위해서는 우주의 온갖 행운이 따라줘야 한다. 행운에 행운이 겹쳐야 볼 수 있는 경이로운 여행지에는 자연이 만들어낸 온갖 예술품이 전시돼 있었다.

그 남자: 세상에서 가장 좁고 긴 캐니언, 벅스킨 협곡

미국에서 가장 위험한 10대 트레킹 코스


우주의 행운이 따르는 자만이…웨이브의 인생샷 남긴다네

매일 오전 9시면 인포메이션센터로 출근 도장을 찍었다. 세 번의 실패 그리고 네 번째 도전의 날 아침, 오늘도 우리에게는 행운의 여신이 웃어주질 않았다. 무거운 발걸음을 이끌고 캠핑카로 돌아오는데 못 보던 자동차 한 대가 눈에 들어왔다. 우리 캠핑카 옆에 나란히 주차된 빨간 승용차 한 대. 차창 안쪽엔 구겨진 배낭과 버너, 먹다 남은 빵 봉지와 찢어진 신문지, 아무렇게나 던져진 옷가지와 진흙 묻은 등산화 등이 빽빽이 들어차 있었다. 무질서한 물건들 사이로 커다란 무언가가 꿈틀대더니 이내 자동차 밖으로 툭 튀어나온다. 본래의 색을 알 수 없을 정도로 남루해진 침낭 사이에서 40대 중반의 깡마른 사내가 고개를 내밀었다. 머리카락 한 올 한 올은 승천할 듯 치솟아 있고, 양 볼은 퀭하니 말라 있었지만 눈빛만큼은 다섯 살 아이처럼 반짝반짝 빛이 나는 사내였다. 말간 그의 눈과 마주친 내가 멋쩍게 웃고 있는 사이 반대편 문으로 그와 똑같이 생긴 사람이 한 명 더 걸어 나왔다. 스티브와 브라이언. 형은 LA, 동생은 뉴욕에 살고 있는 이 쌍둥이 형제는 웨이브에 가 보기 위해 몇 년째 함께 휴가 날짜를 맞춰 이곳을 찾는다고 했다. 절망의 눈빛을 읽었을까? 낯선 우리들에게 쌍둥이 형제는 선뜻 제안했다.

“우리는 오늘 벅스킨 협곡에 트레킹하러 갈 건데, 같이 가지 않을래?”

물결 치는 파도를 닮은 기이한 모습의 더 웨이브(아래).

물결 치는 파도를 닮은 기이한 모습의 더 웨이브(아래).

벅스킨 협곡? 처음 듣는 지명이다. 양 엄지를 추켜세우며 정말 멋진 곳이라고 부추기는 말에 살짝 호기심이 발동한다. 생각 없이 졸래졸래 형제를 따라나섰다. 얼마나 위험한 곳인지도 모른 채. 벅스킨 협곡은 세상에서 가장 좁고 긴 캐니언이다. 총 20㎞에 달하는 이 긴 협곡은 경험이 아주 많은 베테랑 트레커들조차 마음 놓고 접근하기 어려운 지역이라는 건 나중에 안 사실. 미국에서 가장 위험한 10대 트레킹 코스 가운데 하나라는 것도 나중에 안 사실. 벅스킨 협곡 전체를 왕복하려면 2박 이상의 캠핑을 병행해야 하지만 우리는 당일로 갈 수 있는 데까지만 다녀오기로 했다.

자연에서 누워 바라보는 은하수의 감동

트레킹을 시작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보통 체격의 성인 한 명이 겨우 지나갈 수 있을 만큼 비좁은 협곡이 나타났다. 평소엔 마른 협곡이지만 약간의 소나기라도 내리는 날엔 협곡 사이로 빠르게 물이 차올라 금세 급류가 휘몰아치는 계곡으로 바뀐다고 했다. 앞뒤 양옆 어느 곳으로도 급류를 피할 수 있는 곳은 없으며, 사실 익사해서 죽는다기보단 센 물살에 휩쓸려 가다가 바위에 부딪혀 사망하게 된단다. 실제로 이 코스에서 목숨을 잃은 트레커들도 다수 있다는 스티브의 설명을 듣는 순간, 등골이 오싹! 내 표정을 읽었는지 적어도 오늘은 비 소식이 없다며 안심시키는 그의 표정이 익살스럽다.
투박하고 거친 느낌의 벅스킨 협곡은 자연 그대로의 웅장한 모습과 신비로움을 동시에 지녔다

투박하고 거친 느낌의 벅스킨 협곡은 자연 그대로의 웅장한 모습과 신비로움을 동시에 지녔다

그랜드 캐니언이나 자이언 캐니언, 브라이스 캐니언과 호스슈 밴드 등 캠핑카 여행을 하며 둘러보았던 자연들은 모두 세상 어떤 곳과도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독특한 형세를 자랑했지만 독특함으로 치자면 벅스킨 협곡이야말로 그중 최고봉이라 할 만하다. 협곡이라는 점에서 앤텔롭 캐니언과 비슷하다고 할 수 있으나 그보다 더 투박하고 거친 느낌. 자연 그대로의 자연, 그야말로 오지에 내던져진 느낌이다.

온 몸을 최대한 가볍게 만든 후 양 손바닥으로 협곡 벽을 꼭꼭 눌러 짚으며 협곡 안쪽으로 몸을 구겨넣는다. 그렇게 협곡과 내가 하나가 된 순간, 절벽의 숨결이 고스란히 느껴진다. 바위로 인해 깊게 파인 곳에서는 젖은 진흙 향이 짙게 밴 거친 숨소리마저 들릴 듯하다. 직각으로 쭉 뻗은 절벽을 따라 고개를 치켜드니 조각난 푸른 하늘이 눈부시다. 캠핑을 하며 침낭에 누워 바라보는 밤하늘은 더욱 예술이라며 으쓱대는 스티브. 맨몸으로 맨땅, 아니 맨 자연에 누워 바라보는 은하수라니! 상상만으로도 가슴이 뛰는데 그 광경을 직접 본 그의 양 어깨가 올라가는 건 당연지사.

그 여자 : 하루 스무 명에게만 허락된 대자연, 더 웨이브

‘인생사진’ 찍을 수 있는 매력적인 여행지


4전5기 만에 ‘더 웨이브’ 방문권을 얻어냈다. 제비뽑기에 떨어진 수십 명의 사람이 허탈한 표정으로 돌아가자 센터 내에는 승리감을 만끽 중인 10명만이 환한 미소를 지으며 남았다. 센터 직원은 트레킹 중의 주의사항을 일러주며, 웨이브 방문 허가증과 A4 용지 한 장을 나눠줬다. A4 용지에는 11장의 사진이 인쇄돼 있었는데, 웨이브가 훼손될 것을 우려해 표지판을 세우지 않고 이렇게 사진 속 봉우리 모양을 보고 목적지를 찾아가도록 지도로 만든 것이라 했다.

다음날 아침, 웨이브에 도착하면 인생 사진을 찍겠노라는 일념으로 고른 원피스에 얇은 카디건을 덧입고서 길을 나섰다. 반드시 마실 물을 1L 이상 준비하라고 신신당부했을 만큼 건조하고 삭막한 황야를 2시간쯤 걷자 드디어 모습을 드러낸 ‘더 웨이브’. 인터넷에서 접한 사진은 빙산의 일각일 뿐, 그보다 100배쯤은 신비롭고 멋진 풍경이 360도로 펼쳐졌다. 다른 여행지는 마음만 먹으면 다시 갈 수 있지만 이곳은 평생에 언제 또 올 수 있겠나 싶어 머무는 한 걸음 한 걸음 1분 1초가 너무도 소중했다.

우리는 더 웨이브를 스튜디오 삼아 작품 사진, 기념 사진, 코믹 사진 등을 찍으며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놀았다. 그러다 지치면 물결치는 바닥에 벌렁 누워, 하늘을 쳐다보며 준비해 간 샌드위치 한 입 베어물고, 한바탕 신나게 노는 사이 어느덧 뉘엿뉘엿 해가 저물기 시작했고, 난 그에게 말했다.

“이제 돌아가자!”

“뭔가 이상해. 오늘은 날이 흐려서 달이 보이지 않는 것 같아!”

낮 동안 티끌 하나 없이 맑았던, 조금 전엔 아름다운 노을까지 선사해줬던 하늘엔 진회색 구름이 잔뜩 끼어 있었다. 바로 옆에 선 그의 실루엣조차 보이지 않을 만큼 세상은 검게 물들고 있었다. 그제서야 얼른 돌아가야겠다는 남편의 목소리에는 잔뜩 긴장이 묻어났다. 그도 그럴 것이 인쇄된 사진 속의 봉우리들이 하나도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네발로 기어 돌아갈 만큼 어렵고 험난한 코스

우리는 손을 맞잡고 방향을 잡아 길을 나섰다. 배낭 속에서 여분의 끈을 찾아 혹시 모를 일에 대비해 서로의 허리에 묶었다. 한 치 앞도 보이지 않았기 때문에 한 발을 먼저 내디뎌 바닥을 살핀 뒤 다음 발을 디디며 조금씩, 아주 조금씩 움직였다. 그렇게 한참을 헤맸으나 마주한 건 처음 보는 풍경이었다.

“잠깐만! 휴대폰 손전등 좀 켜봐!”

손전등을 켜자 보이는 길 옆은 끝이 보이지 않는 낭떠러지. 돌아가는 길이라 생각했던 그곳이 잔도였을 줄이야! 등골이 서늘했다. 정말 위험한 상황이었기에 손전등을 그대로 밝힌 채 우리는 다시 웨이브의 출발점으로 향했다. 다리가 덜덜 떨리고, 식은땀이 줄줄 흘렀지만 이대로 이곳에 뼈를 묻을 순 없었다. 아무도 우리를 찾아내지 못할 곳이었으니까. 원점으로 되돌아왔을 때쯤 구름 사이로 한 줄기 달빛이 비치기 시작했다. 이 기회를 놓쳐선 안 되겠다. 정신을 가다듬어 눈알이 빠질세라 인쇄된 종이 속 봉우리를 찾았다. 잠시도 쉴 수 없었다. 기온이 뚝 떨어져 걷는 걸 멈추면 한기가 들었다. 저녁을 먹지 못해 허기진 배를 하나 남은 초콜릿으로 채우고, 몇 모금 남지 않은 물로 입술만 적시며 몇 시간을 더 헤맨 뒤에야 드디어 찾아낸 모래 위 희미한 발자국 몇 개. 그제서야 그의 얼굴에 미소가 떠오른다.

유타(미국)=글 정민아 여행작가 jma7179@naver.com

글·사진 오재철 여행작가 nixboy99@daum.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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