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의 도시 이탈리아 베네치아의 명물 곤돌라
물의 도시 이탈리아 베네치아의 명물 곤돌라
베네치아는 애니메이션에서나 나올 법한 ‘물의 도시’ 이미지를 지니고 있다. 물 위에 쌓아올린 도시 베네치아는 인간들이 쌓아올렸다는 바벨탑처럼 믿기 힘들 만큼 신비롭다. 하지만 정확하게 물 위에 만든 도시는 아니다. 베네치아는 자연적으로 방파제 역할을 하는 리도 섬 덕분에 일정하면서도 잔잔한 해수면을 가지고 있다. 마치 호수처럼 말이다. 이러한 자연 조건 덕분에 형성된 라군 위에 흩어져 있는 118개의 섬들이 400여 개의 다리로 촘촘하게 이어져 있다. 작은 섬과 섬 사이를 메워 큰 섬으로 만들지 않고, 더 많은 수로를 만들어 작은 배가 다닐 수 있고, 바다와 맞닿은 곳은 모두 돌로 마무리하다 보니 자연적인 섬이라기보다는 인간들이 물 위에 쌓아 만든 도시처럼 보이게 됐다. 이 실현 불가능한 작업은 10세기 말 동부 지중해 지역과의 무역으로 얻은 경제적 번영이 뒷받침됐기에 가능했다.

놀이동산처럼 펼쳐지는 골목길

베네치아 오래된 골목길의 과일상점에서 과일을 고르는 여인
베네치아 오래된 골목길의 과일상점에서 과일을 고르는 여인
이번 이탈리아 여행의 대미는 이 물의 도시인 베네치아로 정했다. 하지만 여행의 시기가 여름이었던 탓에 베네치아에 도달할 즈음에는 우리는 더위에 지칠 대로 지쳐 있었다. 때마침 버스는 바다를 가로질러 그곳으로 향했다. 저 멀리 베네치아, 본섬이 보이기 시작했다. 역사적 사실과 함께 어린 시절 방구석 한켠에서 몰래 숨어서 보았던 수많은 영화 속에 등장했던 베네치아라는 이유만으로 내 가슴은 요동쳤다. 나의 숨소리가 공간 가득히 울려퍼질 듯 한껏 부풀어 올랐다.

힘차게 오늘의 일정을 시작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옆에 있던 아내가 흔들리는 눈빛으로 나를 바라본다. 불안이 엄습해왔다. “저기…” 어젯밤 베네치아 입성을 기념하기 위해 목욕재계를 마친 뒤 채 마르지 않은 빨래를 널어놓았다고 한다. 문제는, 그 빨래를 널어놓은 곳이 어디인지 확신이 안 선다는 사실. 의자 위였는지, 충전하고 있던 노트북 위였는지, 콘센트 코드 근처였는지 도무지 기억이 나질 않는다고 했다. 만에 하나 젖은 빨래에 의한 누전이 발생한다면 뜻하지 않던 화재로 여행자의 신세는 순식간에 범법자의 신세로 전락하고 말 것이다.
곤돌라를 타고 건물 사이 좁은 수로를 지나는 관광객들
곤돌라를 타고 건물 사이 좁은 수로를 지나는 관광객들
그녀의 통 큰 양보 덕에 오늘은 ‘나 홀로 여행’을 하게 됐다. 혼자 숙소로 돌아가는 아내의 뒷모습을 보자 내심 미안한 마음이 들기도 했다. 하지만 혼자만의 여행, 그 첫 발걸음을 떼자 이내 형언할 수 없는 ‘자유로움’이 오늘의 동반자가 돼 준다. 게다가 이곳은 환상의 아름다움을 품에 안은 베네치아가 아닌가. 눈앞에 펼쳐진 복잡한 골목길은 홀로 헤매기에는 제격인 놀이 동산처럼 보인다. 미로를 품은 미지의 세계 속에서 무언가 반짝이는 걸 발견할 수 있을 것만 같은 기대감. 아니, 기대감은 현실이 된다.

가면 쓰고 즐기는 매력적인 축제

베네치아 구석구석…그 남자, 홀로 즐기다…부라노 섬에서 그 여자, 인생을 맛보다
오래된 골목길의 오래된 건물에서 파는 명품들이 오늘따라 더 가치 있고 진귀해 보였고, 오래된 골목길의 오래된 건물에서 파는 수공품에서는 장인의 숨결이 고스란히 느껴졌다. 모든 물건을 살 수는 없지만, 나에겐 모든 물건을 마음껏 바라볼 시간과 여유가 있다. 그때 눈에 들어오는 진귀한 가면. 더듬이처럼 둥글게 말린 리본이 머리 위를 감싸고 있고, 신비로움을 잉태한 푸른 펄 장식이 눈과 입술 위에 내려 앉아있다. 베네치아는 과거에 엄격한 계급 사회였다고 한다. 하지만 카니발 기간 만큼은 가면을 쓰고 모두가 평등하게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고, 이것이 축제로 용인되면서 자유로운 분위기를 만끽하기 시작했다. 매년 사순절의 2주 전부터 열리는 지금의 카니발은 방문객이 무려 300만 명에 이른다. ‘세계 10대 축제’로 꼽힐 만큼 규모나 볼거리가 풍성한데, 무엇보다 각양각색의 가면으로 한껏 치장한 사람들을 만날 수 있다는 점이 바로 이 카니발의 핵심이다.

다양한 색으로 물든 골목 사이로 불어보는 시원한 바람 속에서 베네치아의 아름다운 탄생 신화를 떠올리다 보니 베네치아에서 가장 유명한 산마르코 대성당에 이르렀다. 베네치아의 현란한 아름다움을 가득 담아 벽 위에 새겨넣은 산마르코 대성당은 5개의 원형 지붕과 화려한 장식들로 채색돼 있다. 이탈리아의 다른 도시들에 있는 대성당들도 하나같이 건축의 멋을 자랑하지만, 베네치아의 산 마르코 대성당은 느낌이 다르다. 이탈리아의 대성당이 웅장한 신사복을 입은 진중한 남성의 이미지라면 베네치아의 대성당은 아름다운 레이스가 수놓아진 부채를 든 화려한 귀부인의 이미지랄까? 보고 있자면 함부로 말을 건네기도 힘들 만큼의 우아함이 느껴진다. 이런 아름다움을 보고 있자니 갑자기 홀로 서 있다는 외로움이 밀려온다. 그때, 거짓말처럼 숙소로 돌아갔던 그녀가 어느새 곁으로 다가와 있었다. 그렇게 우리는 말 없이 베네치아가 주는 아름다움에 흠뻑 젖어 있었다. 베네치아의 아름다움은 언제 어디서나 빛을 발한다.
베네치아 부라노의 알록달록한 건물들
베네치아 부라노의 알록달록한 건물들
레이스 장식과 유리 생산지로 유명

우리 부부가 함께 여행한 대부분의 날은 춤을 추듯 즐겁고 꿈을 꾸듯 행복했으나 문제는 둘 중 한 명에게만 불쑥 찾아오는 여행 매너리즘에 있었다. 매너리즘에 빠진 한 명이 여행에 대한 의욕을 싹 잃은 채 새로운 것을 봐도 시들, 그 어떤 맛있는 걸 먹어도 시큰둥해 있으면 다른 한 명 역시 여행에 영 집중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건 아내인 나보다 훨씬 예민하고 섬세한 감정을 지닌 그가 자주 앓곤 했는데, 마치 향수병 같기도 하고 우울증 같기도 했다. 아무리 옆에서 흥을 돋우려 해봐도 사람의 감정이란 게 그리 쉽겠는가? 그럴 땐 며칠 어쩌면 몇 주일이 지나 스스로 빠져나오길 기다리는 수밖에 별다른 방도가 없었다. 이곳 베네치아 여행을 시작하기 전까지 뭘 봐도 뚱한, 호환 마마보다도 무섭다는 여행 매너리즘에 빠진 남편 때문에 내 여행 또한 흥이 안 나긴 마찬가지였다.
좁은 수로와 화려한 색상의 건물이 어우러져 동화 속 그림처럼 아름다운 부라노의 거리 풍경
좁은 수로와 화려한 색상의 건물이 어우러져 동화 속 그림처럼 아름다운 부라노의 거리 풍경
베네치아에서 여행객들이 주로 찾는 지역은 당연히 가장 유명하고 크기가 큰 본섬이다. 하지만 베네치아 여행은 그게 다가 아니다. 본섬 외에 관광객이 많이 찾는 섬이 몇 군데 더 있다. 그중 대표적인 섬이 부라노, 무라노, 그리고 리도다. 부라노 섬은 베네치아 특산품인 레이스 장식품이 유명하고, 무라노 섬은 유리 생산지로 유명하다. 마지막으로 리도 섬은 백사장을 즐길 수 있는 휴양 섬으로 유명하다.

원래 우리는 베네치아 본섬과 무라노 섬까지만 둘러보기로 했었는데, 첫째 날 나의 부주의로 인해 함께 여행하지 못해 안타까운 마음에 베네치아에서 하루를 더 할애하기로 했다. 오늘의 목적지는 부라노 섬. 부라노 섬은 본섬에서 수상 버스를 타고 무라노 섬으로, 무라노 섬에서 또다시 수상 버스를 타고 30여 분을 더 들어가야 하는 작은 섬마을이다.

크레파스로 칠한 듯한 동화 속 나라

커튼과 화분으로 입구와 창문을 꾸민 부라노의 한 주택
커튼과 화분으로 입구와 창문을 꾸민 부라노의 한 주택
저 멀리 부라노 섬이 보이자 가장 먼저 든 생각은 ‘역시 여행은 돌아서고 싶은 자리에서 딱 한 걸음 더 나아갔을 때부터가 진짜구나!’ 하는 거였다. 여행 중 그 어디에서도 볼 수 없었던 이국적인 풍경이 단번에 내 눈을 사로잡았고, 심장은 곧 사랑에 빠질 것처럼 두근거렸다. 무뎌졌던 여행의 설렘이었다. 베네치아까지 와서, 아니 무라노 섬까지 들렀는데 이곳에 안 왔다면 어쩔 뻔했을까? 섬 전체가 뿜어내는 무지개색 매력을 거부할 수 있는 이는 아마 이 세상에 없을 것 같았다. 아니나 다를까, 섬을 떠나는 사람들의 얼굴에도, 이제 막 섬에 오른 이들의 얼굴에도 천진난만한 아이같이 행복한 미소가 한가득이었다.

항구를 벗어나자 어릴 적 크레파스로 정성스럽게 칠했던 것 같은 알록달록한 집들이 나를 동화 속 나라로 이끌었다. 눈으로 직접 보고 또 봐도 신기한 교통수단인 베네치아의 수로를 가운데 두고 양쪽으로 늘어선 그림 같은 집들은 한 채 한 채가 모두 하나의 독립된 스튜디오 같았다. 색색의 외벽뿐만 아니라 대문과 창문 앞 화분과 장식용 인형들까지 각 집의 벽 색과 완벽히 어울리는 세팅이었다. 더구나 이 집들이 관람객을 위해 일부러 만든 게 아니라 현지인들이 살고 있는 삶의 터전이라는 점이 놀라웠다. 부라노 섬만의 이 독특한 풍경이 과거 안개가 자주 껴 배를 타고 나갔던 남자들이 집을 잘 찾아 돌아올 수 있게 외벽을 칠한 데서 유래했다니 재미있는 일이다.

뒤를 돌아보니 그의 눈동자도 어느새 카메라 렌즈 속에서 반짝반짝 빛나고 있었다. 바빠진 남편의 셔터 소리에서 그도 나처럼 부라노 섬에 푹 빠져 있음을 알 수 있었다. 저렇게 주변을 신경 쓰지 못할 만큼 집중했다는 건 이곳이 단 한순간도 놓치기 싫은 아름다운 곳이라는 얘기다. 이 덕분에 나도 더 이상 그의 기분에 연연하지 않고 부라노 섬의 아름다움에 완전히 매료될 수 있었다. 함께 하는 여행에선 어쩔 수 없이 상대방의 기분이 내 여행의 만족도에 영향을 미치게 마련이다. 내가 좋았던 여행지도 좋지만 그가 웃었던 여행지, 그의 카메라 셔터 소리가 끊이지 않았던 여행지는 항상 옳다.

베네치아= 글 정민아 여행작가 jma7179@naver.com / 글·사진 오재철 여행작가 nixboy99@daum.net

여행정보

베네치아는 원어(이탈리아어)로는 베네치아, 영어로는 베니스라 한다. 아시아나는 인천~베네치아를 오가는 직항편을 주 3~4회 운행한다. 11시간50분 정도 걸린다. 90일 내 무비자로 체류할 수 있다. 한국보다 7시간 느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