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탈리아 화가 빈센초 카무키니(1771~1844)의 ‘줄리어스 시저 암살’(1805년작, 유화, 112×195㎝). 이탈리아 로마 국립미술관 소장.
이탈리아 화가 빈센초 카무키니(1771~1844)의 ‘줄리어스 시저 암살’(1805년작, 유화, 112×195㎝). 이탈리아 로마 국립미술관 소장.
인간사회를 지탱하는 힘은 ‘신뢰’다. 인간은 자신의 생존을 위해 본능적으로 이기적이다. 자신과 가족, 친척, 그리고 친구의 이익은 자신의 이익을 겹겹이 보호하는 방패다. 인간은 도시라는 인위적인 공간을 구축하면서 다양한 문제와 직면했다. 시민들은 각자의 이익을 최대한 보장할 수 있는 중재자를 ‘지도자’라는 이름으로 선출한다. 지도자는 시민들이 도시라는 공동체 생활을 통해 직면할 갈등과 손해를 최소화하는 데 도움을 주는 방안을 마련했다. 그 추상적인 방안이 ‘신뢰’다.

신뢰(信賴)

신뢰는 가족과 같은 작은 단위에서 사회집단과 공동체, 나아가 도시 전체의 유기적인 작동과 안정을 유지하기 위한 마지노선이자 원칙이다. 신뢰는 곧 문명이며, 신뢰가 무너진 사회는 야만이다. 신뢰는 상대가 나를 해하려는 목적으로 나를 속일 수 있다는 걱정을 덜어준다. 그 걱정이 야기하는 무기력함과 우울함을 걷어내고, 다른 사람과의 관계를 위해 물질적이며 정신적인 투자를 가능하게 해주는 가치다. 문명과 문화는 신뢰를 기반으로 쌓아올린 섬세한 건축물이다. 신뢰는 정신적인 건강은 물론, 이와 밀접한 연관이 있는 육체적인 건강에 결정적이다.

‘엣 투, 브루테?’

‘엣 투 브루테(Et tu, Brute)’라는 라틴어 문구를 직역하면 ‘그런데, 브루투스 너마저?’라는 뜻이다. 이 구절은 윌리엄 셰익스피어의 연극 ‘줄리어스 시저(율리우스 카이사르)’(1599년)에 등장하는 대사다. 시저 자신이 친구들에게 암살당하는 순간에 외친 말이다. 시저는 가장 믿었던 친구인 마르쿠스 브루투스마저 자신을 살해하는 데 가담했다는 사실을 확인하고는 자포자기한다. 그 놀라움과 실망감, 그리고 자괴감이 밀려든 외침이다. 시저는 자신을 죽이려고 달려든 암살자들을 보고는 처음엔 저항했다. 그런데 친구 브루투스를 보는 순간, 인생을 포기한다. 시저는 브루투스와의 신뢰인 ‘우정’을, 부하들과의 신뢰인 ‘충성’을 로마제국 건설을 위한 가장 중요한 가치로 여겼다. 우정과 충성이라는 신뢰가 없다면 로마는 혼돈으로 빠져들고 자신이 정치하려는 의미도 사라진다고 생각했다.

셰익스피어가 기록한 대로, 시저의 마지막 외침이 ‘엣 투 브루테’였는지는 확실치 않다. 로마 역사가 수에토니우스는 ‘시저는 아무 말도 남기지 않고 죽었다’고 기록했다. 플루타르코스의 기록은 시저의 실망을 보여줬다. 시저가 브루투스를 보았을 때,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브루투스가 암살자들 가운데 한 명이란 사실을 알고는 자신이 입고 있던 로마시대 겉옷인 ‘토가(toga)’를 자신의 얼굴 위로 끌어올려 덮었다고 썼다. 브루투스는 시저가 암살된 뒤 자신이 암살에 가담한 이유를 다음과 같이 변명한다. “나는 시저를 사랑합니다. 그러나 로마를 더 사랑합니다.” 시저가 로마 삼두정치의 동료였던 폼페이를 살해하고 돌아오자 브루투스는 시저의 권력욕이 로마문명에 해가 될 것이라고 판단했다. 한 사람에게 무한한 권력이 이양되는 것을 막기 위해 시저를 암살하기로 마음먹었다는 것이다.

소포클레스의 ‘필록테테스’에서 네오프톨레모스는 필록테테스의 비참한 상황을 두 눈으로 목격한다. 그는 한편으로는 그의 처지를 안타까워하며 동정했다. 다른 한편으로는 브루투스의 마음처럼 트로이 해변에 진을 치고 있는 그리스연합군의 승리를 위해 망각의 섬이자 경계의 땅에서 살고 있는 필록테테스의 활과 화살을 빼앗는 행위는 정당하다고 스스로 생각한다.

네오프톨레모스의 갈등

네오프톨레모스는 자신도 오디세우스와 그리스 군대로부터 버림받은 존재라는 사실을 알려 필록테테스의 마음을 얻는다. 필록테테스는 오래전 뱀에게 물린 오른발에 바를 약초를 구하러 동굴로 다시 돌아왔다. 이 둘은 동굴에서 해안으로 이동해 미지의 세계로 항해한다. 시간이 지날수록 필록테테스의 고통은 말로 형용할 수 없다. 그는 극도의 아픔으로 인해 ‘아아, 아아’(732행)라고 소리친다. 필록테테스는 자신의 아픔을 더 이상 감출 수 없다. 그는 너무 괴로운 나머지 자신의 발을 칼로 내리쳐 잘라내라고 네오프톨레모스에게 부탁한다. 이런 고통을 겪지 않은 네오프톨레모스는 필록테테스에게 어린아이와 같은 존재다. “오, 얘야! 고통이 나를 죽이는구나. 더 이상 내 고통을 너에게 감출 수가 없구나. 아아, 아아! 고통이 오는구나, 오는구나, 나는 비참하게 되었다. 나는 고통, 바로 그 고통 자체가 되었다. 오, 얘야! 고통이 나를 죽이는구나. 오, 얘야! 고통이 나를 삼키는구나.”(742~745행) 소포클레스는 이 아픔의 소리를 다음과 같이 그리스어 의성어로 표현했다. “아파파이, 파팝파팝파팝파이!(apappappai papappapappapappapai!)”

이 알 수 없는 외침은 극단의 고통을 표현한다. 필록테테스는 고통이 그를 기절시킬 것을 알고 있다. 그래서 망각의 섬에서 자신을 안전하게 지켜주고 사냥을 통해 먹을 것을 마련해 주는 도구를 자신이 신뢰하는 네오프톨레모스에게 맡기려 한다. “이 활을 받아서, 지금 나를 엄습한 이 병의 고통이 지나갈 때까지 안전하게 지켜주시오. 고통이 가라앉기 시작하면, 잠이 나를 엄습합니다. 내가 잠을 자기 전에는 고통이 멈추지 않습니다.”(764~767행) 그리고 그 활을 찾으러 그 섬으로 오고 있는 적들에게 자신의 활을 넘겨주지 말라고 신신당부한다. 필록테테스는 네오프톨레모스를 완전히 신뢰해 자신의 목숨보다 소중한 활을 넘긴다.

네오프톨레모스는 필록테테스가 당하는 고통에 같이 괴로워하지만, 동시에 그를 배신할 계획을 세운다. 그는 자신의 부하들에게 “이 사람은 머지않아 잠들 것이다. 그는 너무 괴로워 머리가 벌써 뒤로 젖혀지고 있다. 그의 온몸에서 땀이 솟아나고 그의 발꿈치에서 검은 피가 쏟아지고 있다. 자, 친구들아! 그가 잠이 들 때까지 가만히 내버려두자!”(821~826행)

애가(哀歌)

필록테테스가 잠들자, 그를 지켜보던 합창대와 네오프톨레모스는 애가를 돌림노래로 부른다. 합창대는 네오프톨레모스가 데려온 그의 부하일 수도 있고, 이 비극을 보고 있는 관객일 수도 있다. 이 애가를 그리스어로 ‘콤모스(kommos)’라고 한다. 콤모스란 ‘슬픔의 표시로 머리나 가슴을 주먹으로 치기’라는 뜻이다. 콤모스는 그리스 비극에서 슬픔이 절정에 도달했을 때 등장하는 노래다. 그리스 비극작가 아이스킬로스의 비극 ‘페르시아인’에서 페르시아의 왕 크세르크세스가 살라미스 전쟁에서 패했을 때 불렀다. 소포클레스의 비극 ‘오이디푸스 렉스’에서 자신의 눈을 상하게 한 오이디푸스가 불렀던 노래다. 합창대의 노래는 잠을 자기 시작한 필록테테스에게 자장가이며, 네오프톨레모스에게는 빨리 출항하자는 촉구다.

합창대에도 잠을 자고 있는 필록테테스는 이중적이다. 그가 자는 모습은 연민의 정을 불러일으키는 한편, 그의 활을 손쉽게 훔쳐 섬을 떠날 수 있는 기회이기도 하다. 그들은 네오프톨레모스에게 어떤 행동을 취해야 할지 알려달라고 한다. “당신도 보고 있는 것처럼, 그는 자고 있습니다. 한데 왜 우리는 행동하기를 망설이는 겁니까? 만사를 결정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야말로 종종 신속한 행동으로 큰 승리를 쟁취하는 지름길입니다.”(835~838행)

신뢰는 인간사회의 버팀목…문명은 이를 바탕으로 쌓아올린 건축물
네오프톨레모스는 망설인다. 그는 아무것도 듣지 못하는 사람을 남겨두고 떠나는 것은 비인간적이며 인간관계의 근간인 신뢰를 저버리는 일이라 여긴다. 그는 활만 가져가는 행동은 헛된 일이라고 단호하게 말한다. “헛된 행위와 거짓말을 자랑하는 것은 치욕이다.”(842행) 합창대는 필록테테스를 버려두고 떠날 때가 됐다고 말한다. “젊은 주인님, 순풍이 불고 있습니다. 이 사람은 시력도 없이, 도와줄 이도 없이 정신없이 자고 있어요.”(855~856행) 과연 네오프톨레모스는 자신을 믿고 따라준 필록테테스를 배신할 것인가?

배철현 < 작가 ·고전문헌학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