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5 뒤 최빈국 벗어나려 안간힘…이승만, 서독에 철강 유학생 보냈다
스탈린의 음모

6·25전쟁은 소련, 중국, 북한이 공모해 대한민국을 국제 공산권으로 끌어들이려고 벌인 전쟁이다. 전쟁의 실질적 주역은 소련의 스탈린이었다. 전쟁은 그의 지시로 시작됐고 그의 죽음으로 막을 내렸다. 1949년 한국에서 서둘러 철수한 미국은 ‘알류산열도-일본-필리핀’으로 이어지는 극동방위선에서 한국을 제외했다. 중국 내전에서는 공산당이 승리했다. 소련은 원자탄을 개발했다. 이런 국제정세에서 스탈린은 미국이 전쟁에 개입하지 않으리라고 예측했다. 아니 개입하더라도 소련으로서는 득이라고 계산했다. ‘미국은 중국이 막을 것이다. 두 나라가 한반도에서 이전투구(泥田鬪狗)를 벌이면 동유럽의 공산혁명은 시간을 벌 수 있다.’ 이런 계산에서 스탈린은 사실상 미국을 유인했다. 유엔 안전보장이사회가 참전을 결의하는 회의에 거부권을 쥔 소련 대사가 출석하지 않은 것은 그 때문이었다.
인천 대한중공업 전경
인천 대한중공업 전경
역사의 변덕

트루먼 미국 대통령은 북한군의 남침 소식을 접하자 곧바로 미국의 참전을 결정했다. 그의 성급한 결정으로 미국이 군사적 가치를 낮게 평가해온 멀고 낯선 지역에서 미국의 젊은이 3만5000명이 전사하고 11만 명이 부상했다. 트루먼은 정치적으로 궁지에 몰렸다. 의회는 대통령이 재량으로 전쟁을 수행할 권리를 회수했다. 이후 6·25전쟁은 미국인에게 최초로 이기지 못한 불명예스러운 전쟁으로 잊혀져 갔다. 독실한 감리교 신자 트루먼에게 한국은 미국의 해외 선교가 가장 볼 만한 성공을 거둔 나라였는지 모른다. 이승만 대통령은 주한 미국 대사에게 트루먼 대통령을 ‘나의 오랜 친구’라고 부른 적이 있다. 그 인연이 애틋하게 작용했는지도 모른다. 어쨌든 역사의 신(神)이 한 인간을 통해 부린 변덕으로 자칫 세계 지도에서 그 이름이 지워졌을 나라가 살아남았다.

미국의 원조 식량으로 이뤄진 국민학교 급식
미국의 원조 식량으로 이뤄진 국민학교 급식
전쟁의 피해

해방 후 남한 경제는 일본의 철수와 남북 분단으로 큰 혼란에 빠졌다. 1946년 남한의 광공업생산은 1944년의 37%에 불과했다. 거기에다 일본과 만주의 한국인이 대거 남한으로 귀환했다. 북한에서 남한으로 쫓겨난 동포도 있었다. 1948년까지 귀환자와 월남민의 총수는 약 300만 명에 달했다. 이들은 주로 도시에 체류하면서 방대한 실업자군을 형성했다. 1947년 서울의 실업률은 34%에 이르렀다. 1947년 이후 남한 경제는 미국의 원조와 대일 무역 재개로 겨우 안정을 찾았다. 1949년 광공업생산은 1944년의 71% 수준으로 복구됐다.

6·25전쟁은 다시 그 모든 것을 파괴했다. 군인, 경찰, 민간인의 사망, 실종, 피랍의 피해는 모두 합해 104만 명, 부상자는 95만 명이었다. 공업시설의 40%가 파괴됐으며 섬유공업의 피해율은 60% 이상이었다. 종업원 5인 이상의 제조업체는 1949년 5100개에서 1953년 2500개로 감소했다. 전쟁 피해액은 30억달러로 추산됐는데, 이는 1952년과 1953년 국민소득의 합과 같았다. 전쟁 도중 대략 70만 명의 북한 주민이 남으로 내려왔다. 그로 인해 실업 문제는 더욱 심각해졌다. 전쟁이 끝난 1953년의 1인당 국민소득은 1910년대 초 수준으로 후퇴했다. 국제적 비교에서는 아프리카 50개국의 평균보다 못한 최빈국 대열에 속했다.
전쟁으로 폐허가 된 서울
전쟁으로 폐허가 된 서울
원조체제

전쟁 이후 미국에 한국은 쉽게 떠날 수 없는 나라가 됐다. 그에 관해 아이젠하워 대통령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일반적인 전쟁 개념에서 볼 때 한국은 군사적으로 중요하지 않다. 그러나 한국은 심리적 및 정치적으로 매우 중요하기 때문에 이 나라를 잃으면 우리는 극동에서 우리의 지위 전체를 상실할 위험이 있다.” 한국은 냉전의 전초기지로 변했으며 미국은 여기서 실패할 수 없었다. 전쟁이 끝날 무렵 미국은 한국의 부흥을 위해 원조를 지렛대로 삼아 한국 경제에 깊숙이 개입하기 시작했다.

1952년 8월 양국 간에 경제조정협정이 체결됐으며 그 실행을 위해 합동경제위원회가 설치됐다. 해마다 원조액이 통보되면 한국 정부는 그 사용계획을 작성해 합동경제위원회의 검토를 받았고, 미국 정부가 최종 승인했다. 한국 정부는 원조 달러를 민간의 수입업자에게 불하했으며, 수입업자가 납부한 한화(韓貨)는 한국은행의 대충자금특별계정에 적립됐다. 대충자금 사용 역시 합동경제위원회의 통제를 받았다. 그렇게 출범한 원조체제는 1970년까지 이어졌다.

1945∼1970년 미국이 공여한 경제 원조는 총 42억달러에 달했다. 이외에 그 규모를 알 수 없는 군사 원조가 있었다. 한국은 미국 원조의 최대 수혜국이었다. 1955∼1961년 경제 원조는 연평균 3억달러 규모였다. 같은 기간 정부 재정수입에서 대충자금 전입금이 차지하는 비중은 평균 43%였으며 심할 때는 50%를 넘었다. 정부의 재정투융자에서 대충자금의 비중은 평균 60%를 초과했다. 1950년대의 국민계정(國民計定)에서 해외 저축, 곧 원조는 국내 저축의 2∼3배였다. 원조의 고정자본 형성에 대한 기여율은 90%에 가까웠다. 전쟁 이후 한국 경제가 이룩한 연평균 4∼5%의 경제 성장은 대부분 원조에 의한 투자 덕분이었다.
삼척 삼화제철의 용광로
삼척 삼화제철의 용광로
전후 부흥

전쟁 이후 한국 경제는 미국의 대규모 원조와 정부의 재정투융자에 힘입어 비교적 급속도로 회복됐다. 1954∼1960년 2차 산업은 연평균 13%의 높은 성장률을 보였다. 전체 산업에서 2차 산업 비중은 1953년의 11%에서 1960년의 18%로 불었다. 제조업에 종사한 공장 수는 1953년 2500개에서 1960년 1만5000개로 증가했다. 제조업 성장을 주도한 것은 식료, 음료, 섬유, 의복, 신발, 제재, 가구, 인쇄 등의 소비재 경공업이었다. 1958년을 지나면서는 중간재와 생산재 공업으로서 고무, 화학, 유리, 철강 등의 비중이 커지기 시작했다.

전후 부흥을 주도한 것은 면방직업이었다. 1960년 제조업에서 면방직업의 부가가치 비중은 24%에 달했다. 1952년 한국 정부와 유엔의 원조기구 유엔한국재건단(UNKRA) 사이에 섬유공업부흥 계획이 성립했다. 이에 따라 1957년까지 면방직업은 방추 44만 추와 직기 1만 대의 시설을 갖췄다. 협소한 국내 시장에서 과잉 시설이었다. 면방직업은 1956년부터 동남아시아와 유럽의 수출시장을 모색했다. 이를 위해 노후시설을 개체하고 선진 기술을 도입하고 생산기반을 다양화하는 등 업계가 기울인 노력은 적지 않았다. 초기엔 정부의 강요로 이뤄진 ‘출혈 수출’이었으나 1960년 이후엔 채산을 맞추는 자력 수출이었다. 1960년대 고도성장을 이끈 섬유공업의 역사는 1950년대 후반부터다.

1950년대 재평가

비슷한 역사를 철강업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해방 후 철강업이라고 할 만한 시설은 삼척의 삼화제철과 인천의 대한중공업 둘밖에 없었다. 그나마 전쟁으로 심하게 파괴됐다. 정부는 1953년 삼화제철의 용광로를 복구했는데 채산성이 맞지 않아 조업이 부진하다가 1958년의 민영화 이후에야 정상화했다. 1954년 정부는 대한중공업의 제강업을 재건하기 위해 서독 회사에 50t급 평로 1기의 건설을 발주해 1956년 준공했다. 이후는 같은 회사에 압연 시설을 발주해 1959년까지 완공했다.

잘 알려져 있지 않지만 철강업에 기울인 이승만 대통령의 열정은 뜨거웠다. 그가 서독에 파견한 100여 명의 철강 유학생은 이후 포항제철 건설에 기여했다. 삼화제철과 대한중공업에 대한 정부의 투자와 더불어 약 30개의 철강공장이 전국에 널린 전쟁 고철을 토대로 족생(簇生)했다. 1960년 철강업 역시 설비 과잉에 빠졌다. 철강업은 그 탈출구를 수출에서 찾았으며 1962년 ‘처녀 수출’에 성공해 고도성장의 문을 열었다.

종래 1950년대는 전쟁, 파괴, 빈곤, 부정부패, 독재로 점철된 절망과 불임의 시대로 인식됐다. 이후 고도성장을 주도한 정치세력은 이승만 대통령과 그의 시대를 의도적으로 폄훼했다. 원조체제에 대해서도 국민 경제를 왜곡했다는 식의 염치 없는 평가가 학계를 지배했다. 공정하게 살피면 이승만 정부가 전쟁 후 불과 6년간에 이룩한 성취는 결코 적지 않았다. 산업과 기업 수준의 역사를 세밀히 추적하면 의외로 연속적이다. 1960년대의 고도성장은 1950년대의 전후 부흥을 토대로 해서야 가능했다.

이영훈 < 前 서울대 경제학부 교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