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마을] '실리콘밸리 신데렐라' 장밋빛 청사진에 모두가 속았다
2013년 9월 7일자 월스트리트저널(WSJ)의 1면 대부분을 스타트업(신생 벤처기업) 이야기가 장식했다. 최첨단 혈액검사 진단 기술을 보유한 테라노스와 설립자인 엘리자베스 홈즈(사진)였다. 집에서 피 한 방울만 직접 뽑으면 수백 가지 질병 유무를 검사할 수 있다는 게 이 스타트업이 내세운 기술이었다. 홈즈는 미국 스탠퍼드대를 중퇴하고 19세에 스타트업을 창업한 미모의 여성이었다. 조지 슐츠 전 미 국무장관은 이 여성에게 ‘제2의 스티브 잡스’ ‘제2의 빌 게이츠’라는 칭호를 붙였다고 이 기사는 전했다.

이듬해 6월에는 포천의 법률 전문기자 로저 파를로프의 기사가 표지를 장식했다. ‘피에 굶주린 CEO’라는 헤드라인과 함께 푸른 눈의 젊은 여성이 검은 터틀넥을 입고 짙은 마스카라와 빨간 립스틱을 바른 모습이 시선을 집중시켰다. 곧이어 포브스도 “온전히 자기 힘으로 억만장자가 된 가장 젊은 여성’이라고 대서특필했다. 홈즈는 일약 스타덤에 올랐다. 미국에서 가장 부유한 사람 400인을 선정해 발표하는 ‘포브스 400’의 표지를 장식했고, 타임지는 세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100인의 한 사람으로 그를 선정했다.

2015년 10월 15일 WSJ 1면에 실린 ‘촉망받는 스타트업의 고군분투’라는 제목의 기사는 이 모든 것을 뒤집었다. 테라노스가 극히 일부 검사를 제외한 모든 혈액검사를 다른 회사의 분석기로 수행하며, 평가시험에서는 속임수를 썼다고 폭로했다. 또한 손가락에서 채혈한 샘플은 희석해서 사용하기 때문에 정확도가 떨어지며 기술적으로 완성되지 않은 분석기로 인해 환자들을 의학적 위험에 노출시키고 있다고 주장했다. 홈즈와 테라노스는 결국 몰락하고 파산했다.

[책마을] '실리콘밸리 신데렐라' 장밋빛 청사진에 모두가 속았다
《배드 블러드:테라노스의 비밀과 거짓말》은 ‘실리콘밸리 사상 최대의 사기극’으로 막을 내린 테라노스가 어떻게 설립돼 성장하고 몰락했는지를 파헤친 책이다. 저자는 WSJ의 탐사보도 전문기자 존 캐리루로, 지난해 미국에서 출간된 책은 뉴욕타임스와 아마존에서 장기 베스트셀러에 올랐다.

피 한 방울만 뽑으면 수백 가지 질병검사를 집에서 할 수 있는 기기를 개발했다는 홈즈의 선언은 그야말로 혁명적이었다. 손가락을 찔러 피 한 방울을 채취한 뒤 신용카드만한 플라스틱 카트리지로 옮겨 이를 토스터 크기의 판독기에 넣으면 데이터 신호를 추출해 서버에 무선으로 전송한다. 서버가 그 데이터를 분석한 뒤 결과를 판독기로 돌려보낸다. 이게 테라노스가 개발한 기술의 원리였다. 나노기술과 마이크로 기술을 진단 분야에 적용해 고통 없이 혈액을 채취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

의욕이 넘치고 집요하며 언변까지 뛰어난 홈즈는 모든 사람의 관심을 모았고 엄청난 자금을 끌어들였다. 스스로 애플 창업자를 흉내 내며 터틀넥을 즐겨 입어 ‘여자 스티브 잡스’로 불렸다. 테라노스의 기업 가치는 한때 90억달러(약 10조원)까지 치솟았고, 그는 자수성가형 억만장자 반열에 올랐다.

하지만 모든 것은 신기루였다. 테라노스가 ‘에디슨’이라고 명명한 분석기는 완성되지 않은 시제품이었고, 수백 가지 혹은 1000가지도 넘게 검사할 수 있다는 것은 부풀려도 너무나 부풀린 것이었다. 더구나 승승장구하는 홈즈의 유명세는 눈 밝은 사람들의 의심을 샀다. 2014년 12월 더뉴요커에 실린 그의 프로필을 본 병리학자이자 유명 블로거인 애덤 클래퍼는 ‘사실이라기엔 너무 좋아서 수상하다’고 생각했다. 테라노스의 여러 가지 허점을 파악한 클래퍼는 퓰리처상을 두 차례나 받은 적이 있는 WSJ의 캐리루 기자에게 이를 제보했다.

캐리루 기자는 테라노스를 퇴사한 전 직원 60명을 포함한 160여 명의 내부 고발자를 인터뷰하고 조사해 홈즈와 그의 연인이자 회사 내 2인자였던 서니가 저지른 비행과 비리 증거를 샅샅이 파헤쳤다. 혈액검사 기기의 신뢰성은 물론 기기의 부실함을 감추기 위한 속임수와 강압, 위선, 의심하는 직원에 대한 해고까지 낱낱이 드러냈다. 이 과정에서 테라노스는 엄청난 규모의 로펌을 동원해 기자는 물론 관련 사실을 증언해줄 사람들을 협박하고 감시와 미행도 서슴지 않았다.

홈즈의 주술 같은 장밋빛 비전에 혹해 거액을 투자한 명사들의 명단을 보면 입이 쩍 벌어진다. 유명 벤처투자가 도널드 루커스, 미국 최대 잡화·식품·건강보조제품 판매업체 월그린의 닥터J와 웨이드 미크롱, 대형 유통업체 세이프웨이의 CEO 스티브 버드, 월마트 창업자 샘 월튼의 상속자들과 WSJ를 소유한 미디어 재벌 루퍼트 머독 등이 테라노스에 투자했다. 이뿐만이 아니다. 트럼프 행정부의 국방장관을 지낸 제임스 매티스, 헨리 키신저, 조지 슐츠 등 정계 거물들도 테라노스의 후원자 노릇을 했다.

저자는 “홈즈의 초심은 의심하지 않는다. 진정으로 믿고 실현하려는 비전이 있었고, 이를 위해 온몸을 바쳤다. 그러나 ‘유니콘’ 붐의 골드러시 가운데서 선의의 조언을 듣지 않고 절차와 원칙을 무시했으며 이것이 결국 그와 테라노스를 몰락의 길로 이끌었다”고 평가했다. 경청하지 않는 오만함이 브레이크 없는 욕망과 만났을 때 초래되는 비극이다.

서화동 문화선임기자 fireboy@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