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원전 420년께 제작된 테라코타 ‘렘노스 섬에 있는 필록테테스’. 뉴욕 메트로폴리탄 미술관 소장.
기원전 420년께 제작된 테라코타 ‘렘노스 섬에 있는 필록테테스’. 뉴욕 메트로폴리탄 미술관 소장.
오디세우스는 네오프톨레모스에게 필록테테스를 울부짖기만 하는 짐승과 같은 존재로 설명했다. 필록테테스는 비인간적인 존재로, 트로이 전쟁에서 승리하기 위한 엄숙한 희생 제물일 뿐이라는 것이다. 필록테테스는 이전에 성공적인 트로이 군사 작전을 위한 제사를 방해해 렘네스 섬에 버려졌다. 네오프톨레모스는 섬에 도착해 그런 야만인인 필록테테스를 수색한다. 그러나 네오프톨레모스가 만난 필록테테스는 짐승이 아니라 인간이었다. 필록테테스가 낸 첫 번째 소리는 고통스러운 외침이 아니라 인간으로서 예의를 갖춘 정교한 말이었다.

필록테테스의 의욕적인 대화

필록테테스는 인간됨의 핵심인 ‘말하는 능력’을 아낌없이 발휘한다. “오, 나그네여? 당신은 누구입니까? 적당한 포구도 없고 거주자들도 없는 이 땅에 들어온 당신은 누구입니까? 당신은 어느 나라 사람이며 내가 당신을 어느 가문의 사람이라고 말해야 합니까? 당신의 옷차림을 보니 나에게는 반가운 그리스인 같아요. 당신의 목소리를 듣고 싶어요. 내 몰골을 보고 두려워 떨지 말아요. 아니 비참하고, 외롭고, 유기되고, 친구도 없는 사람을 불쌍히 여겨주세요. 당신이 이곳에 친구로 왔다면, 내 말에 답해 주세요. 당신과 내가 대화하는 기회를 놓친다면, 그것은 적절치 않아요.”(219~231행)

필록테테스는 새로 도착한 그리스인을 ‘나그네’라고 부른다. 그리고 대화하는 것이야말로 인간이 할 수 있는 최고의 특권이자 특징이라고 말한다. 여기서 ‘기회를 놓친다’란 의미를 지닌 그리스어는 ‘하마르테인(hamartein)’이다. 이 단어는 아리스토텔레스가 비극적인 주인공이 지닌 치명적인 결함을 의미할 때 쓴 단어 ‘하마르티아’의 동사형이다. 인간이 대화하지 않는 것은 인간이기를 포기하는 비극적인 사건이다.

필록테테스는 도시문명의 혜택을 받는 시민의 자질을 일련의 질문을 통해 드러낸다. 필록테테스의 질문은 대답을 요구하고, 그 대답은 상대방에 대한 정체성을 또다시 요구한다. 필록테테스는 이 낯선 나그네에게 그의 고향과 민족, 언어를 묻고 그가 친구로 왔는지 아니면 적으로 왔는지 묻는다. 이 질문들은 도시문명을 누리는 문화인이 지닌 내용이자 형식이다.

내용은 그 낯선 자가 속한 사회의 정체성이다. 필록테테스는 자신이 그와 동일한 사회의 일원인지를 확인하고 싶어 한다. 필록테테스의 대화는 연결과 우정을 요구하는 시도다. 질문은 연결을 바라는 인간의 상징적인 행동이다. 그 질문은 철학적 난제에 대한 대답을 바라든지 혹은 대화 그 자체를 시도해 우정을 쌓고자 하는 시도다. 질문은 자신이 아직 모르는 내용에 대한 표현이다. 오랫동안 외딴 섬에 버려진 필록테테스는 친구가 필요하다.

네오프톨레모스는 필록테테스의 질문을 간파해 바로 대답한다. “나그네여! 당신도 나도 그리스인이란 사실을 먼저 알아두십시오!”(232행) 필록테테스는 자신이 외로운 존재가 아니라 문명의 상징인 그리스의 일부분이란 사실에 기뻐한다. “얼마나 반가운 소리입니까. 오랜만에 동향 사람으로부터 인사말을 받을 수 있다니!” 그리스인의 말은 필록테테스에게 반갑고 사랑스럽다. 같은 언어의 소통은 자신의 불행한 처지로부터 벗어날 기회로 이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필록테테스는 자신의 말이 가져다줄 희망과 선물에 기뻐한다.

네오프톨레모스의 소극적인 대화

필록테테스와는 달리 네오프톨레모스는 소극적이다. 그는 대화에 적극적으로 임하지 않는다. 그가 대화를 꺼리는 이유는 필록테테스에 대한 선입견 때문이다. 오디세우스는 네오프톨레모스에게 경고했다. 필록테테스가 오디세우스나 그와 관련된 사람들에게 분개하고 있다고. 네오프톨레모스에게 필록테테스는 오디세우스나 그 관련자들을 보는 즉시, 강력한 화살로 쏴 죽일 분노로 가득한 자다.

네오프톨레모스가 대화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지 않은 보다 근본적인 이유가 있다. 네오프톨레모스는 오디세우스의 사주를 받아 필록테테스를 감언이설로 속여 그의 활을 훔쳐야 한다. 그는 진정성이 결여된 말을 사용해야 한다. 그는 인간을 인간되게 만든 말을 이용해 우정을 구축하는 것이 아니라 거짓과 속임을 조장하고, 친구로서의 선물을 주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상대방이 가진 가장 소중한 활과 화살을 훔치려 하기 때문이다.

설득

상대방을 설득하려는 대화는 비극 《필록테테스》의 중요한 주제다. 네오프톨레모스와 필록테테스의 대화를 통해 작가 소포클레스는 ‘무엇이 인간을 정의하고, 인간의 모임인 공동체를 구축하는가’를 아테네 시민들에게 묻는다. 인간의 언어는 내가 아닌 다른 사람과의 접촉이다. 이 비극은 언어, 특히 남을 속이려는 거짓된 언어를 개인이 속한 공동체의 ‘정의로운 목표’를 위해 남용해도 되는가를 묻는다.

필록테테스에게 말은 자신이 해야 할 행동과 연결되는 수단일 뿐만 아니라 자신의 인격과 개성을 상대방에게 적나라하게 드러내는 수단이다. 그에게 말은 상대방과 우정을 맺겠다는 표식이며, 이 관계를 통해 문명과 문화의 기반이 되는 가장 작은 단위인 낯선 사람, 새로운 사람과의 신뢰를 쌓기 위한 시도다. 필록테테스는 말을 통해 자신이 문명사회의 일원이란 사실을 확인한다. 반면에 네오프톨레모스는 자신의 말이 자신이 속한 공동체의 안녕을 위해 희생돼야 하는 거짓이기 때문에 주저한다. 그에게 말은 정치적인 목적을 위해 효과적으로 사용해야 하는 수단이다.

네오프톨레모스는 필록테테스의 과거를 모른 체하고, 양심의 거리낌을 품고 거짓말을 시작한다. 자신도 아트레우스의 두 아들인 메넬라오스와 아가멤논, 그리고 오디세우스에게 속아서 이 섬에 오게 됐다고 말한다. 네오프톨레모스는 필록테테스의 신임을 얻고자 자신도 오디세우스의 적이 됐다고 거짓말을 한다. 네오프톨레모스는 장황하게 오디세우스가 자신의 아버지인 아킬레우스의 무구를 자신에게 주지 않고 어떻게 빼앗아갔는지 설명한다. 그리스 군인들의 가장 중요한 ‘명예’를 무시하고 아버지의 무구를 앗아간 오디세우스는 그에게 원수라고 강조한다. 네오프톨레모스는 필록테테스가 느끼는 배신과 고통을 충분히 이해하는 친구가 된다.

필록테테스는 고통을 당하는 자였으나 이제는 다른 사람의 고통을 듣고 이해하고 슬퍼할 수 있는 사람이 됐다. 그는 다른 사람의 이야기를 통해 자신의 고통을 제3자의 입장에서 바라볼 수 있게 됐다. 비극 공연을 관람하는 사람들은 무대에서 연기하는 배우들을 자신과는 상관없는 타인으로 보지 않는다. 비극 관람에 몰입하는 순간, 자신은 무아의 상태로 진입해 사라지고, 무대에서 흐느껴 우는 배우가 된 자신을 관찰한다. 그리스어로 극장에 해당하는 ‘테아트론(theatron)’의 의미는 ‘자기 자신을 제3자의 눈으로 관찰하는 장소’다. 기원전 5세기 인류는 처음으로 자신을 제3자의 눈으로, 심지어 원수의 눈으로 보는 시민 훈련을 시작한 것이다.

네오프톨레모스는 자신의 고통을 장황하게 나열한다.(343~390행) 이 두 사람의 고통은 모두 오디세우스로부터 출발했다. 네오프톨레모스가 아버지 아킬레우스의 죽음을 언급하자, 필록테테스도 자신의 아버지를 상기한다. 필록테테스는 네오프톨레모스와 심리적인 동질감을 형성하고, 그에게 간절히 부탁한다. “젊은이여, 내 지금 당신의 아버지와 당신의 어머니와 당신의 집에 있는 모든 소중한 것들을 두고, 애원합니다. 당신은 나를… 이렇게 혼자 버려두고 가지 마십시오.”(468~472행)

공동체의 '정의로운 목표'를 명분으로 남용되는 거짓된 언어
‘애원하다’라는 의미의 그리스 단어 ‘히케테우오(hiketeuo)’는 탄원자가 신전에 가서 신에게 부탁하는 의례 행위를 지칭하는 동사다. 필록테테스는 망각의 섬이자 야만과 경계의 땅인 렘노스 섬을 떠나게 해달라고 신과 같은 네오프톨레모스에게 부탁한다. 네오프톨레모스는 필록테테스를 섬에서 데리고 나갈 구원자다. 필록테테스는 신에게 간청하듯 부탁한다. “나를 불쌍히 여겨주십시오. 인간의 운명은 공포와 위험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행운과 불행은 돌고 돈다는 점을 생각해 보십시오. 고통의 바깥에 있는 자는 위험을 살펴야 하고, 잘나가는 자일수록 인생을 주의 깊게 살펴야 합니다.”(502~505행) 필록테테스는 이제 네오프톨레모스와 함께 섬을 떠나 문명사회로 돌아갈 희망에 부풀어 있다.

배철현 < 작가 ·고전문헌학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