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륵불의 下生을 기다리는 섬…
맛의 고장, 전라도 태생인 필자가 처음 경상도 통영에 매혹된 것은 오로지 음식 때문이었다. 통영이 전라도 음식에서 발견되던 개미진(감칠맛 나다의 전라도 사투리) 맛의 유전자가 경상도에도 있다는 사실을 알려주었기 때문이다. 경상도 음식은 맛없다는 편견을 깨뜨려준 도시 통영. 특히 해산물 요리에 관한 한 통영은 이 나라 으뜸이다. 그중에서도 겨울 통영의 맛은 극상이다. ‘통영은 맛있다’는 찬탄이 절로 나올 정도다. 골목으로 들어서면 아직 8000원짜리 회정식을 파는 집이 있고, 뚝배기 하나를 시켜도 생굴이나 멸치회무침 등이 반찬으로 나온다. 그중 압권은 역시 ‘다찌집’이다. 다찌집이란 술을 시키면 안주는 그날그날 주인 마음대로 내주는 선술집이다. 정확한 어원은 알 수 없지만 다찌노미란 일본 말에서 유래했다는 설이 유력하다. 아무튼 관광 다찌가 아니라 지역 사람들이 애용하는 다찌집을 잘만 찾아가면 겨울에 맛볼 수 있는 거의 모든 해산물을 한 상에서 받아볼 수 있다. 그것도 이미 만들어 놓은 식은 음식이 아니다. 즉석에서 해 주는 대면 요리다. 최근에 자주 가는 단골 다찌집에서 헤아려 보니 회를 포함한 싱싱한 날것의 수만 11가지나 됐다. 방어회, 전복, 멍게, 호래기, 개불, 피조개, 오징어, 참소라, 굴, 해삼, 해삼내장젓. 통영이 아니면 불가능한 차림이다. 시금치나 몰 등의 나물류도 더없이 맛깔스럽다. 개조개 유곽이나 해물잡채 등 통영 아니면 맛볼 수 없는 진귀한 요리들도 나온다. 경상도 음식을 얕잡아 보던 전주나 목포 사람들도 통영 다찌 음식을 한 번 맛보고 나면 엄지를 치켜든다.

물산이 풍부해서 요리가 발달한 통영

날마다 주인 마음대로 안주를 내주는 통영의 다찌집에서는 바다에서 갓 잡은 싱싱한 해산물을 맛볼 수 있다.
날마다 주인 마음대로 안주를 내주는 통영의 다찌집에서는 바다에서 갓 잡은 싱싱한 해산물을 맛볼 수 있다.
대체 통영이 유독 맛있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이 궁금해서 나그네는 통영을 연구하기 시작했고 그 결과물로 《통영은 맛있다》란 제목의 책까지 냈다. 처음엔 통영 사람들에게 통영이 특별히 맛있는 이유를 물어봐도 속 시원하게 대답해 주는 이가 없었다. 조선시대 높은 벼슬아치가 통영을 다스렸기 때문에 한양에서 궁중 음식문화를 가져온 것이 이유가 아니겠느냐 짐작할 뿐이었다. 납득이 되지 않았다. 그렇다면 왕이 살았던 서울의 음식이 가장 맛있어야 하지 않겠는가. 같은 고위직이 다스리던 다른 지역도 다 맛있어야 하지 않겠는가. 그런데 서울 음식이 맛있다는 소리는 듣지 못했다. 그래서 통영 맛의 근원을 파헤쳤다.

미륵불의 下生을 기다리는 섬…
결론은 두 가지다. 하나는 조선시대 내내 통영은 경상도가 아니었다는 점이다. 또 하나는 삼도수군통제영의 본영이 있던 통영은 어느 지역보다 물산이 풍부했다는 점이다. 맛이란 물질적 풍요 속에서 나온다. 전라도 음식문화가 발달한 이유는 배후에 호남평야 나주평야 같은 곡창 지대가 있었기 때문이다. 배 채우기 급급하면 맛을 따질 여유가 없다. 요리가 발달할 수도 없다. 부가 있어야 요리도 발달한다. 아무리 맛있는 도미라도 맨날 구워 먹기만 하면 질린다. 그래서 도미 배 속을 가르고 소고기와 야채를 다져 넣고 삼색 지단을 올린 뒤 쪄내는 도미찜이 나오는 것이다. 그렇게 음식문화가 시작되는 것이다.

통영은 조선시대 수군 3만 명 이상이 주둔한 최고의 군사 도시였다. 군수 물자가 넘치니 물산이 풍요로울 수밖에 없었다. 심지어 화폐를 발행하는 주전소까지 있었다. 게다가 통영은 1602년 공사를 시작해 1604년에 완공된 신도시였다. 임진왜란 직후 여수에 있던 삼도수군통제영이 통영 땅으로 옮겨 오면서 전라도 출신 군사들이 대거 이주해왔고 여기에 경상도와 충청도 지역 병사들까지 합류했다. 군수품을 조달하는 12공방을 만들면서 8도에서 가장 뛰어난 장인들을 불러왔다. 또 전국 각지 상인들이 군수품을 조달하기 위해 통영으로 몰려와 살았다. 경상도 땅에 생긴 도시에 전라도를 주축으로 한 전국 각지 사람들이 뒤섞여 만들어진 융복합 도시가 통영이었다. 게다가 경상도 관찰사나 삼도수군통제사나 같은 직급이었으니 지휘받을 일이 없었다. 통영은 특별자치구역이었다. 통영과 경상도는 동급이었던 거다. 그 기간이 통제영이 폐영되는 1895년까지 무려 300년 동안 지속됐다. 300년 동안 통영은 경상도가 아니었고, 그 문화 또한 통영만의 독자적인 것이었다. 그래서 통영은 지금의 경상도 다른 지역에 비해 유독 빼어난 음식문화를 이어 올 수 있었다. 아무튼 술꾼들이나 해산물을 좋아하는 이들에게 겨울 통영은 천국이다. 해산물이 가장 풍성하고 맛있는 시기가 겨울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겨울이 어디보다 따뜻하다. 서울이 영하 10도일 때 통영은 영상이다. 무려 10도 이상 따뜻하다. 겨울 통영을 찾지 않으면 후회할 이유다.

편백나무숲이 광활하게 펼쳐진 미륵도

일제 강점기 일본인에 의해 조성된 미래사 편백숲.
일제 강점기 일본인에 의해 조성된 미래사 편백숲.
통영은 많은 섬을 거느리고 있지만 가장 가까운 섬은 미륵도(면적 32.9㎢)다. 통영 반도와 다리로 연결돼 있어 자각하기 어렵지만 미륵도 또한 섬이다. 도시화되고 케이블카가 생긴 뒤에 쉽게 미륵산 정상에 오르다 보니 통영 여행자들도 정작 미륵도란 섬에 대해서는 잘 알지 못한다. 하지만 미륵도에는 케이블카나 루지 말고도 많은 이야기가 깃들어 있다. 미륵불의 하생을 기다리는 섬이 아닌가. 진짜 미륵도를 느껴보려면 한 시간이면 충분한 등산로를 따라 미륵산을 오르거나 미륵산 둘레길을 따라 걷는 것이 좋다. 미륵산의 압권은 산정에 올라서 보는 한려해상 국립공원의 바다와 섬들 풍경이다. 안개라도 낀 날은 산수화가 따로 없다. 가히 ‘몽유통영도원도’가 펼쳐진다. 미륵산의 또 다른 명품은 미래사 편백숲이다. 100년 가까이 되는 편백나무숲이 16만5289㎡나 펼쳐져 있지만 아는 이도 많지 않고 찾는 이도 드물다. 미륵산 정상에서 20분만 걸어 내려가면 도착할 수 있다. 용화사에서 출발해 임도를 따라 걸어도 30분이면 다다른다.

통영에서 가장 가까운 섬인 미륵도 앞 바다 풍경.
통영에서 가장 가까운 섬인 미륵도 앞 바다 풍경.
미래사 편백숲은 본래 일제 강점기 일본인이 심은 것인데 후일 미래사에서 매입해 관리해오고 있다. 편백나무는 다른 침엽수보다 세 배 이상의 피톤치드를 뿜어낸다고 한다. 그래서일까? 편백이 암을 치료하는 데 좋다는 소문이 나 더러 암 환자들이 찾아와 편백숲 아래 텐트를 치고 생활하며 기력을 얻어 가기도 한다. 미래사는 법정스님이 출가해 행자생활을 한 절이다. 박재철은 1932년 전남 해남에서 태어나 목포에서 자랐고 전남대 상과대학 3학년 때인 1954년 이곳 미래사에서 효봉스님을 은사로 출가해 법정이 됐다. 법정은 출가 후 미래사에서 부목(땔감 담당 나무꾼) 노릇을 하며 행자생활을 했다고 한다.

미래사는 그리 오래된 절은 아니지만 미륵산에는 천년 고찰이 있다. 용화사와 도솔암이다. 용화사는 신라 선덕여왕 때 은점(恩霑)스님이 창건했다. 처음 정수사(淨水寺)라 이름했다가 용화사로 바뀌었다. 도솔암 창건 설화는 호랑이 이야기가 깃들어 있어 이채롭다. 도솔암은 고려 태조 20년(943)에 창건됐다. 창건주인 도솔스님은 17세에 지리산 칠불암으로 출가해 수도하다가 25세 때 미륵산으로 옮겨와 바위굴에서 수도생활을 하며 살았다. 그러던 어느 날 호랑이 한 마리가 찾아와 괴로워하며 입을 벌리고 도와달라고 애원했다. 사람을 잡아먹은 호랑이의 고통을 어찌 할 것인가? 딜레마에 고민하던 도솔은 결국 호랑이 입에 걸린 비녀를 뽑아내 준다. 그 뒤 호랑이도 무언가 깨달은 게 있었던 것인지 늘 도솔 곁에 머문다. 몇 달이 지난 어느 날 호랑이는 처녀 하나를 물어다 놓고 훌쩍 떠나버린다. 제 먹이를 나눠주는 것으로 도솔과의 인연도 끊어 버린 것이다. 호랑이는 결국 호랑이었던 것이다.

도솔은 기절한 처녀를 정성껏 간호해 되살린다. 사정을 들으니 처녀는 전라도 보성 관아의 아전인 배 이방 딸이었다. 처녀는 혼인날을 받아놓고 목욕하다 호랑이에게 물려온 것이다. 도솔이 보성까지 처녀를 데려가자 배 이방은 감격에 겨워하며 거금 300냥을 시주한다. 그 처녀 목숨값으로 지어진 절이 도솔암이다. 도솔암은 한때 남방제일선원(南方第一禪院)으로 이름 높았다. 6·25전쟁 직후에는 법정스님의 스승이자 조계종 종정을 지낸 효봉(曉峰)선사가 잠시 의탁하기도 했다. 지금도 도솔암 위쪽에는 도솔이 수도한 천연암굴이 있다고 전한다.

통영 최고의 해변도로 삼칭이 해안길

미륵도를 찾는 이들이 케이블카 못지않게 많이 가는 곳은 달아 전망대다. 섬들 사이로 떨어지는 일몰이 장관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빼어난 풍광을 가졌는데도 숨겨진 보물이 또 있다. 삼칭이 해안길이다. 본래 해안 침식을 막기 위해 쌓은 제방에 자전거 길을 낸 것이 통영 최고의 해변 길이 됐다. 잘 알려지지 않아 자전거를 타는 이도 거의 없고 걷는 이들만 간간이 보이는 길이다. 길은 통영국제음악당 앞에서 시작해 영운리 마을까지 4㎞에 걸쳐 있는데 가는 내내 바다와 섬들을 바라보며 걸을 수 있는 해안 길이다. 시멘트 도로라는 것이 흠이긴 하지만 언덕 하나 없이 평탄한 길이어서 느릿느릿 산책하기 딱 좋다.
미륵불의 下生을 기다리는 섬…
삼칭이란 삼천진에서 유래했다. 조선시대에는 영운리 마을에 삼도수군통제영의 수군진이 있었다. 그 진이 삼천진이었는데 진장은 종9품의 하급 무관인 권관(權管)이었다. 조선시대 변경지방 진관(鎭管)의 최하 단위인 진보(鎭堡)에 두었던 종9품의 수장이 권관이다. 삼천진은 본래 통영이 아니라 삼천포에 있었다. 삼천포란 고려시대 개경에서 뱃길로 3000리 거리였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라 전한다. 그 삼천진이 통영으로 옮겨지면서 이름도 따라와 삼천진이 됐고 삼칭이로 불린 것이다. 예전에는 군사집단 주둔지가 바뀌면 그 이름도 따라서 옮겨지곤 했다. 군산은 지금의 땅이 아니라 선유도에 있었다. 선유도가 본래 군산도였고 거기 군산진이 있었는데 진이 옮겨 가면서 이름도 따라가 지금의 군산이 된 것이다. 경기도 남양에 있던 영종진이 지금의 영종도로 옮겨 가면서 이름도 따라가 자연도였던 섬이 영종도가 됐다.

통영 최고의 해변으로 꼽히는 삼칭이 해안길.
통영 최고의 해변으로 꼽히는 삼칭이 해안길.
삼칭이 해안 길을 따라 가다 보면 손바닥만한 모래사장이 하나 있는데 통영 공설 해수욕장이다. 이 마을이 수륙리인데 삼도수군통제영 시대 죽은 군인들의 원혼을 달래는 수륙재를 행하던 장소다. 수륙재란 수륙(물과 육지)에서 헤매는 외로운 영혼과 아귀를 달래고 위로하기 위해 불법을 강설하고 음식을 공양(供養)하는 불교의식이다. 수륙도량(水陸道場) 혹은 수륙법회라고도 하는데 수륙재를 지내면 떠돌던 넋들이 불보살의 가피를 받아 극락으로 천도된다고 믿어진다. 삼칭이 길은 종현산(188m) 둘레를 돌아가는데 산이 바다에서 바라보면 거대한 종(鐘)을 하늘에 매달아 놓은 것처럼 보인다 해서 지어진 이름이다.

이 길의 가장 빼어난 풍경은 복바위다. 복바위는 영운리 앞바다에 있는 바위섬이다. 세 개의 바위섬이 나란히 서 있는데 이 섬들에는 애틋한 전설이 깃들어 있다. 까마득한 옛날 옥황상제의 근위병 셋이 선녀 셋과 함께 이곳에 내려와 몰래 사랑을 나눴다. 그런데 옥황상제가 누군가. 아무리 숨겨도 다 알아낼 수 있는 전지전능한 힘의 소유자가 아닌가. 화가 머리끝까지 치솟은 옥황상제는 불벼락을 내려 그들을 모두 바위로 만들어 버렸다. 대체 사랑이란 무엇일까? 천상의 주인인 옥황상제마저도 질투심에 눈멀게 하는 것이 사랑이라면, 사랑의 힘은 신보다 강한 것이 아닌가. 두렵고 두려워라 사랑이여!

미륵불의 下生을 기다리는 섬…
강제윤 시인은

강제윤 시인은 사단법인 섬연구소 소장, 섬 답사 공동체 인문학습원인 섬학교 교장이다. 《당신에게 섬》 《섬택리지》 《통영은 맛있다》 《섬을 걷다》 《바다의 노스텔지어, 파시》 등 다수의 저서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