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운 사람을 만나 마음을 터놓는 친구가 되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걸린다. 함께 보내는 시간이 늘면서 차츰 서로를 파악해 간다. 자연스럽게 자신을 드러내고 진솔한 대화로 친밀감을 쌓는다. 하지만 익명이 가능한 온라인상에서는 단계적인 접근이 필요 없다. 자신의 관심 분야로 직행하고 불특정 다수에게 사적인 부분을 보여주는 데도 거리낌이 없다.

가상현실(VR) 기술의 발전은 이와는 또 다른 관계의 가능성을 보여준다. VR에서는 익명의 공간임에도 오프라인에서의 어색함과 수줍음, 친근감을 경험할 수 있기 때문이다. 《미래는 와 있다》에서는 이를 ‘현존감(presence)’으로 설명한다. 현존감은 뇌가 가상의 경험에 속아서 그 경험이 실제인 것처럼 몸이 반응하는 것이다. 저자인 피터 루빈은 “현존감은 VR의 토대”라고 설명한다. 그는 과학기술문화 잡지 ‘와이어드’의 필자이자 편집자로 VR에 천착해왔다.

[책마을] '감정이입' 마법 부리는 VR, 세상에 없던 인간관계 보여줄까
VR이라고 하면 여전히 게임이나 영화에 한정해 생각하는 사람이 많은 것이 현실이다. 그런 가운데 VR이 새로운 세상을 열 것이라는 예측이 아니라 친밀감을 형성하고 감정을 촉진시켜 사회의 변화를 가져올 것이라는 주장이 책장을 넘기게 한다. ‘진짜 사람’이 없어도 사람의 특정 감정을 유도할 수 있게 된다는 얘기다.

아직 먼 이야기로 들릴지 모른다. 하지만 생각해 보자. 마크 저커버그가 페이스북을 창업한 것은 2004년, 스티브 잡스가 애플의 아이폰을 처음 내놓았을 때가 2007년이다. 불과 10여 년 만에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와 스마트폰은 우리의 생활을 파고들었다. 저자는 “VR은 승강기처럼 흔한 장치로 실용적이고 일상적인 기기가 될 것”이라며 “사람들이 매일 쓰고 서서히 일상생활의 일부가 되면서 우리가 살아가는 방식을 바꿔놓을 것”이라고 예상한다. VR을 활용해 만성 통증을 치료하거나 마약성 진통제 남용을 줄이는 데 기여할 수도 있다. 부동산 중개업소에만 들러도 멀리 떨어져 있는 집을 살펴볼 수 있고 자동차 전시장에 앉아서 가속페달을 밟는 고속주행도 가능하다.

가상과 현실 간 모호해진 경계의 부작용은 없을까. ‘인공 낙원에서 정신줄을 놓을 가능성’에 대해 저자는 “모든 혁신은 진입과 낙오를 걱정하는 물결을 일으키기 마련”이라고 일축한다. 올더스 헉슬리의 소설 《멋진 신세계》 같은 고전 작품에나 등장하는 오래된 디스토피아 시나리오일 뿐이라는 것이다.

책은 각종 우려를 딛고 인터넷이 소통과 공동체 형성에 기여했듯 VR도 현재 제기되는 비관적인 시선들을 넘어설 수 있을지에 대한 답을 제시한다. VR에서 허우적대는 우울한 미래가 아니라 감정 교류의 수단으로서 VR의 의미와 활용법에 대한 출구를 찾고 싶다면 정독해볼 만한 책이다. (피터 루빈 지음, 이한음 옮김, 더난, 340쪽, 1만7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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