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마을] 500여개 기업 설립 도운 '일본 자본주의의 아버지'
시부사와 에이이치(澁澤榮一·1840~1931)는 ‘일본 근대자본주의의 아버지’로 불리는 인물이다. 그는 갓 출범한 일본 메이지 정부 대장성에서 3년 반 정도 경제관료로 일한 뒤 기업 현장으로 몸을 옮겼다. 관료 시절에는 측량, 도량형 개정, 조세 개정, 지폐제도 도입, 철도 부설 등 근대 경제 건설에 핵심적인 정책을 입안하고 집행했다. 이후 시부사와는 도쿄 증권거래소, 도쿄 상법회의소, 제일국립은행 등 근대 일본 경제의 핵심적인 기관과 회사의 설립에 관여했다.

그는 도쿄전력, 도쿄가스, 오사카방적회사, 시미즈건설, 도쿄해상동일화재보험, 제국호텔, 오지제지 등 평생 500여 개의 기업과 경제조직 설립에 기여했다. 그러면서도 자신의 재벌기업군을 조성하지 않았다. 그는 1874년 도쿄양육원을 설립하고 56년 동안 원장을 맡았다. 만년에는 국제 친선활동에서도 업적을 남겨 노벨평화상 후보로 언급되기도 했다.

《일본의 설계자, 시부사와 에이이치》는 시부사와가 거물 경제인으로 활동하기 이전의 청년기까지를 다룬 구술 자서전이다. 19세기 중후반 일본 막부시대 말기와 유신기라는 희대의 격동기를 어떻게 헤쳐나왔는지 여러 에피소드와 함께 전한다.

시부사와의 집안은 호농층이라 불리던 상업적 농민경영자였다. 밭농사와 쪽 재배, 양잠을 하며 비교적 넓은 땅을 보유하고 촌내 리더 역할을 했다. 당시 일본은 300년 가까이 유지되던 도쿠가와 막부 체제가 흔들리고 있었다. 특히 1853년 6월 네 척의 군함을 앞세워 도쿄만에 들이닥친 미국 페리 제독의 압력으로 강제 개항을 당했다. 막부는 미·일친화조약을 맺어 위기를 모면하는 듯했지만 이를 계기로 막부의 정권 독점에 도전하는 세력이 대두하기 시작했다.

당시엔 서양과 조약을 맺은 비겁한 막부보다 천황 휘하에 모여 서양 오랑캐와 일전을 벌이자는 존왕양이(尊王攘夷)가 대세였다. 귀족, 군인뿐만 아니라 농촌의 지도적인 농민을 중심으로 정치적 움직임이 일었다. 24세의 젊은 시부사와도 이런 분위기 속에서 생업을 버리고 정치에 뛰어들었다. 그는 사람들을 규합해 폭정 변란을 일으킬 계획을 세웠다.

그러나 거사를 실행하기 직전, 무의미한 희생만 불러올 것이라는 친구의 설득으로 폭동을 접는다.

낭인 생활을 하던 시부사와는 우연한 기회에 막부의 유력한 친족이자 훗날 마지막 쇼군이 되는 도쿠가와 요시노부 밑에서 일할 기회를 얻는다. 하급 관리로 시작했지만 재정 안정을 꾀하는 여러 개혁 방안이 채택되면서 초고속 승진을 거듭했다. 그는 1867년 프랑스 파리 만국박람회 참가단의 일원이 돼 서양 문화를 목도하게 됐다.

프랑스에서 막부의 멸망 소식을 듣고 졸지에 망국의 신하가 된 그는 급거 귀국한다. 그는 능력 있는 인재를 찾던 메이지 신정부에서도 눈에 띄어 관리로 발탁됐다. 대장성에서 재무 담당으로 일하며 경제 기틀을 닦았다. 하지만 정부에서 아무리 제도를 개정해도 상공업을 개량하거나 진보시킬 수 없음을 깨닫는다.

그는 상업에 투신해 기업을 세우는 것만이 일본 경제를 부흥할 수 있다고 확신했다. 이 책은 결국 시부사와가 관직을 그만두고 민간경제에 투신하는 부분에서 끝을 맺는다. 폭도에서 경제 관료로, 다시 실업가로 변화해가는 젊은 시절 시부가와의 도전을 통해 근대 일본의 발전 과정을 엿볼 수 있다.

최종석 기자 ellisica@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