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8년 서울 압구정동 일대에서 한 농부가 밭을 갈고 있다. 뒤로 갓 지어진 현대아파트가 보인다. / 사진작가 전민조 제공
1978년 서울 압구정동 일대에서 한 농부가 밭을 갈고 있다. 뒤로 갓 지어진 현대아파트가 보인다. / 사진작가 전민조 제공
‘광화문 시민회관 쪽의 이 길은 언제부턴가 서울에서 가장 붐비는 길의 하나가 되었다. (중략) 여학생이라 불리는 과년한 미혼여성들이 유독 많은 게 이 거리이기도 하다. (중략) 이 근처에 그들의 모습이 유독 눈에 띄는 것은 학관이 많이 있기 때문이다. (중략) 구보 씨는 걸어가는 왼쪽에 나타난 이순신의 동상을 쳐다보았다.’

소설가 최인훈이 박태원의 동명 단편을 이어받아 1969년부터 1972년 초까지 쓴 연작소설 ‘소설가 구보 씨의 일일’의 한 부분이다. 1970년대 초 서울 세종로의 거리 풍경을 소상하게 묘사하고 있다.

6·25전쟁 때 수많은 건물이 파괴돼 한동안 폐허로 남아 있던 세종로가 다시 정치와 행정의 중심지로서 기능을 회복하기 시작한 건 1960년대 초반부터였다. 전쟁으로 내부 시설이 파괴됐던 중앙청(옛 총독부 건물)은 수리와 복구를 거쳐 1962년부터 사용되기 시작했다. 한 해 전에는 시민회관이 완공돼 사람들을 끌어모았다. 시민회관은 그러나 1972년 12월, ‘10대 가수 청백전’을 하던 중 큰불이 나 사라졌고 그 자리에 1982년 세종문화회관이 완공됐다. 따라서 구보 씨가 포착한 광화문 풍경에는 1968년에 세워진 이순신 장군 동상과 1972년 사라진 시민회관이 공존했던 약 4년간의 시대가 반영돼 있는 셈이다.

[책마을] 서울은 어떻게 서울이 됐나…소설 속에서 답을 찾다
《서울 탄생기》는 최인훈, 박완서, 이청준, 이호철, 김승옥, 박태순, 하근찬, 손창섭, 조세희, 윤흥길, 최일남, 조선작, 조해일, 이문구 등 작가 16인의 소설 110여 편에 투영된 서울의 모습을 통해 현대도시 서울이 어떻게 형성됐는지를 추적한다. 저자는 이런 작업을 통해 도시로 몰려든 이주민의 삶이 변화시킨 도시공간, 도시개발로 인한 공간의 변화가 사람들의 일상과 의식에 미친 영향을 읽어낸다.

책은 1960~1970년대를 세 시기로 나눠 접근한다. 본격적인 도시 개발의 전사(前史)에 해당하는 1961~1966년은 현대도시를 형성한 법적·행정적·지리적 토대가 마련된 시기다. 서울에 도시개발의 광풍이 불어닥친 1966~1972년은 군인 출신인 김현옥 서울시장의 부임과 함께 시작된 ‘불도저식’ 도시개발 정책과 경제개발계획의 성공에 따라 국가권력의 힘과 자본주의 논리가 도시 공간에 침투하는 시기다. 도시 현대화와 고층화의 깃발 아래 도로와 교통체계가 개편되고 서울이 대대적 변화를 겪는 것이 바로 이때다.

세 번째 시기는 강남 개발이 본격화된 1972~1978년이다. 이뿐만 아니라 도시빈민과 하층민들이 도심에서 내몰리고 계층화, 계급화되는 것도 이 시기라고 저자는 설명한다. 강북에 한정돼 있던 도시개발의 중심이 강남 신시가지로 옮겨가고 강남과 강북, 도시 중산층과 서민, 서울과 위성도시들 사이에서 새로운 위계질서가 형성되는 과정에 저자는 주목한다.

책에 인용된 작품은 다양하다. 이호철의 1966년작 ‘서울은 만원이다’에는 1963년에 확장된 서울의 행정적 경계를 정확히 반영하고 있다. 망우리와 천호동이 서울에 편입된 게 이때였다. 김승옥의 ‘서울 1964년 겨울’ 등에 등장하는 ‘종삼’(종로3가)의 집창촌, 고향을 떠나 서울로 온 사람들이 하숙집을 전전하는 모습을 담은 박태순의 1966년작 ‘서울의 방’, 무작정 상경한 주인공의 서울살이를 담은 최일남의 ‘서울의 초상’, 양옥과 판자촌의 판잣집을 대비시킨 김승옥의 ‘역사(力士)’, 공동주택인 연립셋방에 사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다룬 조해일의 ‘방’, 1970년대 서울 판자촌과 철거민들의 상황을 담은 조세희의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

문학 작품에 투영된 과거 서울의 풍경과 이에 대한 저자의 설명을 읽노라면 마치 고고학의 발굴 현장을 보는 듯하다. 빌딩 숲으로 변한 무교동, 서린동이 이전에는 어떤 모습이었으며 어떤 과정을 거쳐 현재와 같은 모습이 형성됐는지 알 수 있다. 아파트 단지와 빌딩으로 상징되는 현대식 개발의 과정에 어떤 정치적·경제적 배경이 개입돼 있는지도 보여준다.

계획과 무계획이 뒤섞인 서울의 변천사는 많은 아쉬움도 남겼다. 전통적인 서울의 모습이 사라졌고, 무허가 불량주택이라는 꼬리표를 단 가난한 사람의 주거공간은 폭력적으로 철거됐다. 저자는 이 모든 문제를 국가의 발전주의 정책과 식민주의적 사고의 탓으로만 돌릴 수는 없다고 지적한다. 서울 정착에 성공한 사람들 모두가 얼마간은 동조자요, 공범자였기 때문이다. 위장전입과 학벌주의, 부동산 투기 마인드를 당연시하는 현재의 세태를 유산으로 남겨놓았다는 것이다.

서화동 문화선임기자 fireboy@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