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마도 바다의 화려한 해넘이 풍경. 섬은 모양이 큰 말을 닮았다고 해서 대마도라는 이름이 붙여졌다.
대마도 바다의 화려한 해넘이 풍경. 섬은 모양이 큰 말을 닮았다고 해서 대마도라는 이름이 붙여졌다.
얼마나 많은 섬이 몰려 있으면 이름도 새 떼 섬일까! 조도군도(鳥島群島)를 아우르는 진도군 조도면은 이 나라에서 면 단위로는 가장 많은 섬이 모여 있는 섬 왕국이다. 섬으로만 이뤄진 지방자치단체인 옹진군이나 강화군, 남해군, 보령시 등보다 섬이 많다. 조도면에는 무려 179개 섬이 있다. 이 중 유인도가 37개, 무인도는 142개다. 조선 시대 조도는 동아시아의 교두보를 찾던 영국 함대가 그 지정학적 가치를 먼저 발견한 섬이다. 거문도 점령 이전 영국은 조도를 동양 진출의 발판으로 삼으려 했다. 그래서 1816년, 청나라 산둥성 웨이하이(威海)를 순방하고 돌아가던 영국 함대 3척은 조도에 들어가 조사 활동을 벌였다. 그 기록이 리라호 선장 바실 헐이 쓴 《한국 서해안과 유구도 탐색 항해 전말서》라는 보고서다. 헐은 진도 조도해역이 ‘동양에서 항구 건설에 가장 좋은 후보지’라 주장했다. 헐은 ‘산마루에서 주위를 바라보니 섬들 모습에 가슴이 벅차올랐다. 섬을 세어보려 애를 썼으나,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120개는 되는 듯했다. 경치는 황홀감을 주기에 충분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톳, 몰, 미역 채취해 높은 소득 올리는 섬

179개 섬의 노래가 들리는 진도 조도면…馬 닮은 대마도는 오늘도 달린다
조선 왕조가 섬을 버려두고 있을 때 제국주의 열강은 조선 섬의 가치에 주목했다. 하지만 그때나 지금이나 조도 인근 작은 섬은 국가의 관심 밖에 있다. 여전히 하루 한두 번만 여객선이 다닐 정도로 교통 불편이 심하다. 대마도 역시 하루 여객선은 두 번뿐, 뭍으로 가는 길은 조선 시대만큼이나 멀다. 하지만 섬은 해조류 양식이 잘되는 바다를 끼고 있어 소득은 넉넉한 편이다. 대부분의 주민이 해조류 양식장과 공동 어장인 갱번에서 톳, 몰, 미역 등을 채취해 높은 소득을 올리고 있다. 주민등록상 105명의 인구 중 생활보호대상자는 3인뿐이니 다른 빈한한 섬에 비해 경제적인 어려움은 적다. 특히 몰 양식이 잘돼 주민들은 “트럭에 몰 한 짐 싣고 가면 돈 한 짐 싣고 온다”고 이야기할 정도다.

그런데 대마도 또한 노령화로 섬의 미래가 불안하다. 인구 소멸 지역이 되지 않기 위해 섬 주민들이 적극적인 노력을 펼치고 있다. 섬에 살고 싶어도 외지인이 섬에 들어가 살기 어려운 이유는 어촌계 진입 장벽이 워낙 높기 때문이다. 어촌계에 가입해야 양식업을 할 수 있고 섬 주변 해역에서 해산물도 채취해 생활할 수 있다. 그런데 많은 섬 어촌계에서는 몇 해 거주 후 일정한 금액의 가입비를 내야만 어촌계 가입을 허락한다. 물론 섬 주민 생존권 보장 차원에서 어촌계 규약이 부당한 장벽은 아니다. 자원은 한정돼 있는데 무한정 나눌 수도 없다.

대마도에는 대마리와 대막리 두 개 마을이 있다. 그런데 대마리에서는 근래 외지인에 대한 어촌계 진입 장벽을 허물기로 마을 총회에서 결정했다. 1년 정도의 적응 기간만 거치면 가입비 없이 양식업을 할 수 있는 권한을 부여하기로 한 것이다. 공동체가 섬의 미래를 위해 스스로 기득권을 내려놓은 것이니 참으로 소중한 결정이다. 그 노력을 인정받아 대마도는 전라남도의 ‘가고 싶은 섬 가꾸기’ 사업에 선정되기도 했다. 대마도 대마리 마을 공동체가 약속한 어촌계 진입 장벽 해소는 분명 외지 청년들의 대마도 유입에 크게 기여할 것으로 보인다. 노령화되고 있는 섬이 다시 젊어질 계기를 마련한 것이니 그 의미가 크다.

해삼이 잘 자라는 대마도 바다

대마리 주민들은 어촌계 진입 장벽이 해소된 사실이 널리 알려져 대마도로 이주해 오는 청년들이 늘어나기를 소망한다. 실제로 대마리 어촌계에서는 이주해온 외지인에게 나눠줄 양식장 면적을 확보해 놓고 있다. 분배 가능한 곳은 톳 양식장 일부다. 대마리에서는 현재 13가구의 양식 어가에서 600줄의 톳 양식을 하고 있다. 대마리 어촌계에서 분할해 주려는 양식장은 시아시 해변 앞 바다인데 여기에 200줄 정도가 들어갈 수 있는 면허지가 있다. 가구당 20줄 정도를 나눠준다면 적어도 10가구 정도의 신규 양식이 가능한 면적이다. 현재 2가구가 대마도로 이주해 분할 대기 중이니 나머지 8가구 정도의 신규 분양이 가능하다.
바다와 맞닿아 있는 대마도 섬마을. 해조류 양식이 잘돼 소득은 넉넉한 편이다.
바다와 맞닿아 있는 대마도 섬마을. 해조류 양식이 잘돼 소득은 넉넉한 편이다.
대마도 정착을 위해 들어온 입도자에게는 1년간 생존할 수 있는 일자리까지 제공한다. 톳 양식이나 몰 양식장 취업, 공공근로 등을 통해 일자리 8개 정도는 어렵지 않게 마련할 수 있다고 한다. 그 밖에도 갱번의 공동 작업을 통해 기본적인 소득 확보도 가능하다. 신규 이주자는 갱번에 가입한 뒤 갯강구 모개비(갱번 리더)로 역할하게 한다. 이 정도면 1년 동안 생활하기 모자람 없는 수입이 확보된다.

대마도 바다는 해삼이 아주 잘 자란다. 그래서 중국의 장자도그룹이란 회사에서 대마도 인근 바다에 해삼 치어를 뿌려 시험 양식을 하고 있다고 한다. 아직 어촌계와 정식 계약은 하지 않은 상태인데 이후 성장 상황을 지켜 본 뒤 계약 여부를 결정할 예정이라고 한다. 여러 해 전에도 마미동 해안에 중국 회사에서 해삼을 뿌려놓고 시험 양식을 했지만 그 후 소식이 없었다. 그런데 대마도 어민들이 마미동 바다에 그물을 끌어서 엄청나게 많은 해삼을 얻었다. 대마도는 해삼 양식으로도 큰 수입을 올릴 수 있는 섬이다.

조선 시대 국영 말목장으로 추정

2.457㎢ 면적에 100여 명이 살아가는 섬. 대마도는 섬 모양이 큰 말처럼 생겼다고 해서 ‘대마도’ 또는 ‘대마리’라 했다고 전해진다. 1847년 《비변사등록》에는 대마도(大馬島)가 아니라 망치 마()를 써 대마도(大島)로 표기돼 있으며, 18세기 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되는 《영남호남연해형편도(嶺南湖南沿海形便圖)》 ‘호남연해형편도’에는 대천도(大千島)로 기록돼 있다.
선착장에서 담소를 나누며 배를 기다리는 대마도 아낙네들.
선착장에서 담소를 나누며 배를 기다리는 대마도 아낙네들.
다양한 명칭으로 불려 정확한 이름의 유래를 알기 어렵다. 대마리 마을 뒷산은 말을 기르는 ‘마장(馬場)’이라 불렀으며, 산 옆 능선을 ‘마장제’라 불렀다는 것으로 미뤄 조선 시대 많은 섬이 그랬던 것처럼 한때 대마도 또한 국영 말목장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대마도에서는 매년 음력 정월 초사흗날 마을의 풍요와 안녕을 비는 제사인 당제를 지냈다. 당제는 동쪽 산허리에 있는 큰 소나무당과 마을에 있는 아랫당에서 모셨고 해안가에서는 용왕제를 모셨다. 윗당에서는 특별히 정성을 들였다. 당제 지낼 때는 제관이 정월 초하루에 제당에 올라가 3일날 내려왔다. 제관은 제물로 잡을 소를 데리고 갔는데 소가 당 앞에다 똥을 싸기라도 하면 부정 탔다고 해서 제관을 다시 뽑을 정도로 엄했다. 제관은 소변을 보면 손을 씻고 대변을 보면 목욕을 해야 돼 추운 겨울에 고생하는 것이 싫어 제 지내기 1주일 전부터 단식하기도 했다. 당제 땐 마을 주민들이 농악기를 들고 당굿도 쳤으나 1970년대에 중단됐다.

해수욕은 물론 한적하게 거닐기 좋은 대마도 해변 백사장.
해수욕은 물론 한적하게 거닐기 좋은 대마도 해변 백사장.
대마도 짝지골에는 섬마을 공동체의 신화적인 삶의 단편을 보여주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해방 후 짝지골에는 산신님이라 불린 할머니와 산신님 남편인 할아버지가 살았다. 비손하는 분이었다. 대신 손으로 빌어주는, 기도해 주는 일이 비손이다. 비손하는 이는 일종의 사제와 같다.

김씨 집안 할머니였는데 할머니는 늘 하얀 명주(비단) 옷을 곱게 차려입고 고고한 모습으로 있었다. 밭일이나 땔감 등 살림은 모두 할아버지 몫이었다. 누군가 아프거나 또 소원하는 일이 있으면 마을 주민들은 산신님께 아주 공손히 부탁드렸고 그러면 산신님은 사철나무에 띠를 매어두고 호롱불을 켜놓고 손으로 빌며 기도를 바쳤다. 산모가 아이를 낳을 때도 기도해 주었는데 산신님이 곁에서 바라만 봐 주어도 산모는 편안함을 느꼈다. 아이도 더 쉽게 낳았다.

황칠로 만든 황칠보양탕 특별한 먹거리

대마도에는 시아시 해변과 마미동 해변 두 곳의 아름다운 백사장이 있는데 해수욕하기는 물론 한적하게 거닐기에도 더없이 좋다. 대마도 서북쪽에는 깎아지른 듯이 날카로운 ‘빠진골’이라는 절벽이 있는데 여기에 깃든 이야기도 애절하다. 옛날에 대마도에 장오 딸이라는 여인이 있었다. 어느 날 사랑하는 남자가 바다에 나가 돌아오지 않자 여인은 남자를 그리다 절벽에서 뛰어내려 죽었다. 그래서 이곳을 ‘장오 딸 빠진골’이라 한다.
대마도 인근 바다에서 잡은 전복, 소라, 문어에 황칠나무수액을 넣어서 요리한 황칠보양탕.
대마도 인근 바다에서 잡은 전복, 소라, 문어에 황칠나무수액을 넣어서 요리한 황칠보양탕.
대마도 동쪽에는 썰물 때만 드러나는 암초인 ‘오복여’가 있다. 여기 얽힌 사연도 신비롭다. 100여 년 전에는 오복여가 없었다고 한다. 당시에는 지금의 학교터에 마을이 자리하고 있었는데, 어느 날 갑자기 마을 앞에 오복여가 나타나자 사람들이 깜짝 놀라 마을을 지금 자리로 옮겼다고 전한다. 떠내려온 섬 이야기는 서남해 섬들에 드물게 나타나는 서사 중 하나다. 대마도에도 전해진다는 사실이 흥미롭다.

대마도 인근 해역은 전복, 소라, 문어 등 해산물이 풍부하기로 유명하다. 그래서 대막리에는 황칠보양탕이라는 아주 특별한 먹거리가 있다. 그 찬란한 황금빛 때문에 왕실의 칠로 통하는 황칠은 옻칠보다 더 귀한 칠이다. 황칠은 황칠나무 수액을 정제해 만드는데, 종이나 대나무는 물론 금속 공예에 도료로 쓰인다. 황칠나무는 주로 제주도, 보길도, 진도, 홍도 등 남쪽 섬 지역에서만 자생해온 귀한 나무다.

당(唐)나라 시대에 저술된 《통전 通典》에는 “백제 서남지방 바다 가운데 세 섬에서 황칠이 나는데, 6월에 백류(白流)를 채취해 기물에 칠하면 금빛과 같아서…”라는 기록이 있다. 또 《계림지 鷄林志》도 “고려의 황칠은 섬에서 난다. 6월에 수액을 채취하는데 빛깔이 금과 같으며, 볕에 쪼여 건조시킨다. 본시 백제에서 나던 것인데, 지금 절강(浙江) 사람들은 이를 일컬어 신라칠(新羅漆)이라 한다”고 기록하고 있다. 예부터 서남해 섬 특산물로 유명했던 것이다. 황칠은 《삼국사기(三國史記)》 《고려사절요(高麗史節要)》 등에도 신라칠(新羅漆)이라는 이름으로 등장하고 《임원십육지(林園十六志)》에는 천금목(千金木)이라 기록돼 있다.

황칠나무의 학명은 덴드로 파낙스(Dendropanax morbifera)인데 이 라틴어를 번역하면 만병 통치 나무다. 예로부터 뛰어난 약효를 인정받은 것이다. 황칠나무는 항산화작용이나 혈압, 당뇨 등의 치료에도 효과가 있다고 알려져 있다. 그래서 요즘에는 칠보다 약용 나무로 쓰임새를 넓혀 가고 있다. 대마도에 자생하는 황칠나무를 이용해 차려 내는 음식이 황칠보양탕이다. 전복, 문어 등 귀한 해산물과 토종닭에 황칠나무 잎과 가지를 넣고 푹 삶아 내는 요리로, 원기 회복에 최고다. 대마도에 꼭 가봐야 할 이유 중 하나다.

강제윤 시인은

179개 섬의 노래가 들리는 진도 조도면…馬 닮은 대마도는 오늘도 달린다
강제윤 시인은 사단법인 섬연구소 소장, 섬 답사 공동체 인문학습원인 섬학교 교장이다. 《당신에게 섬》 《섬택리지》 《통영은 맛있다》 《섬을 걷다》 《바다의 노스텔지어, 파시》 등 다수의 저서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