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재 화가 이중섭(1916~1956)은 전쟁 통이던 1952년 늦은 봄 경남 통영을 찾았다. 6·25전쟁의 상흔이 조금 덜한 곳에서 작업도 할 겸 잠시 머물 생각이었다. 매일 눈앞에 펼쳐지는 쪽빛 바다의 시원함과 봄 햇살이 교차하는 눈부심은 그의 마음을 사로잡기에 충분했다. 김상옥 김춘수 유치환 등 많은 예술인과 교류하며 통영의 매력에 흠뻑 빠진 그는 ‘선착장을 내려다본 풍경’ ‘남망산을 오르는 길이 보이는 풍경’ ‘충렬사 풍경’ 등 풍경화를 쏟아냈다. 비둘기, 개구리, 나비를 등장시켜 부드러운 감수성을 표현한 ‘복사꽃 가지에 앉은 새’는 지난해 덕수궁미술관에서 열린 ‘이중섭 100년의 신화’전에서 황소 그림을 제치고 인기투표에서 1위로 꼽혔다.

김종학의 ‘설악산 풍경’.
김종학의 ‘설악산 풍경’.
이중섭의 ‘복사꽃 가지에 앉은 새’를 비롯해 유영국 이대원 김종학 박대성 이왈종 이숙자 사석원 문형태 등 한국 화단의 쟁쟁한 작가들의 다양한 판화 작품을 한곳에서 감상할 수 있는 자리가 마련됐다. 서울 중림동 한국경제신문사 1층 한경갤러리가 서울옥션과 공동으로 크리스마스와 연말을 맞아 펼치는 ‘메리 아트-마스’ 판화전을 통해서다.

오는 31일까지 이어지는 이번 전시에는 작가들이 사인한 프린트베이커리 판화에서부터 원화를 복제한 뒤 사인한 ‘오프셋 판화’에 이르기까지 30여 점이 걸렸다. 국내외 미술시장에서 평가받는 유명 화가들의 다양한 형태의 판화를 보면서 작품 시장성과 원본·사본의 관계 등을 조명해볼 수 있다. 판매가는 점당 12만원부터 400만원까지 다양하다. 연말 부모님이나 연인, 스승, 지인 등에게 온정의 표시로 ‘문화’를 선물할 수 있는 좋은 기회다.

이왈종의 ‘제주 생활의 중도’.
이왈종의 ‘제주 생활의 중도’.
출품작은 한국 근·현대미술 거장들의 미학적 감성을 다채롭게 보여준다. 먼저 현대판 풍속화로 유명한 이왈종의 ‘제주 생활의 중도’ 시리즈 판화 일곱 점이 관람객을 반긴다. 사람과 꽃, 사슴, 새 등 동식물을 한 화면에 배치해 공존의 아름다움을 풀어낸 작품들은 우리가 쉽게 지나쳐버리는 ‘중도의 세계’를 일깨워준다.

‘보리밭 작가’로 잘 알려진 이숙자 화백의 판화 작품도 나와 있다. 툭툭 불거진 보리 이삭을 암채(岩彩)를 사용해 그대로 살려낸 작품은 우리의 토속적인 정서와 연결돼 강인한 생명력으로 다가온다. 50대 인기 작가 사석원의 작품 ‘꽃과 당나귀’도 걸렸다. 커다란 눈망울에선 금방이라도 눈물이 쏟아질 것만 같은 당나귀가 장미 다발을 지고 있는 모습이 별스럽다. 음율이 느껴지는 힘찬 필치의 장미는 고흐의 해바라기처럼 꿈틀댄다.

한평생 ‘꽃비’처럼 살다 간 한국 화단의 거목 이대원의 ‘농원’, 설악산의 다양한 이미지를 마음속에 담아뒀다가 작업실에서 하나하나 꺼내 그린 김종학의 작품, ‘산의 화가’로 불리는 유영국의 추상화, 강력한 필선으로 독도를 잡아낸 박대성의 현대적 수묵화, 조선시대 백자 달항아리를 사진보다 더 섬세하게 표현한 고영훈의 작품, 유년 시절 고향 땅에 대한 그리움과 추억을 팝아트 기법으로 묘사한 박형진의 작품 등도 눈길을 끈다.

김경갑 기자 kkk10@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