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광영 화백이 뉴욕 브루클린미술관의 개인전에 출품한 2015년작 대형 설치작품 ‘집합’.
전광영 화백이 뉴욕 브루클린미술관의 개인전에 출품한 2015년작 대형 설치작품 ‘집합’.
‘한지 미술의 거장’ 전광영 화백(74)은 칠순이 지났는데도 ‘꿈을 꾼다, 고로 존재한다’는 말을 절대적으로 신봉한다. 지금도 세계 정상을 향해 미국 유럽 아시아 지역을 빈틈없이 누빈다. 지난 50년 동안 비행기에 몸을 싣고 지구 100바퀴(약 400만㎞)를 돌며 ‘미술 한류’ 개척에 앞장섰다.

미국 와이오밍대 미술관을 비롯해 일본 모리아트센터, 캐나다 몬트리올의 란다우 갤러리, 싱가포르 타일러센터, 베니스 비엔날레 특별전, 스코틀랜드 에든버러 축제, 벨기에 보고시앙재단 등에 잇달아 초대되며 국제 미술계의 뜨거운 찬사를 받았다. 2009년 미국 코네티컷주 얼드리치현대미술관의 초대전은 리뷰 기사가 뉴욕타임스에 실릴 만큼 좋은 평가를 얻었다. 할리우드 스타 실베스터 스탤론은 그의 작품에 반해 미국 최대 그림 장터 ‘2015 아트 바젤 마이애미 비치’에서 두 점을 29만달러(약 3억2000만원)에 사들여 화제를 모았다.

뉴욕 브루클린미술관에 첫발

전 화백이 이번엔 세계 예술의 심장부인 뉴욕에서 한국 현대미술의 저력을 뽐내고 있다. 미국에서 두 번째로 오래된 역사를 지닌 뉴욕 브루클린미술관의 초대를 받고 내년 7월28일까지 개인전을 펼치고 있다. 한국 작가로는 처음이다. 뉴욕 5대 미술관에서 전시를 연 국내 작가로는 백남준(휘트니뮤지엄), 이우환(구겐하임뮤지엄), 이불(뉴욕현대미술관)에 이은 네 번째다.

전광영
전광영
브루클린미술관은 브루클린 예술과학협회를 모태로 1897년 개관했다. 초기에는 중남미의 토기와 염직품(染織品)을 비롯해 고대 이집트의 조각, 석제품 등을 주로 수집했으나 점차 컬렉션의 폭을 넓혀 중동, 중국, 한국의 조각과 회화를 모으고 있다. 소장품만 160만 점에 달한다. 미국 천재 화가 장 미셸 바스키아 회고전을 막 끝낸 미술관이 전 화백을 전격 유치해 9개월간 전시회를 여는 게 매우 이례적이다. 전 화백은 전시 기간에 대형 평면 및 입체 작업 여섯 점을 내보이며 뉴요커의 시선을 사로잡고 있다.

미술 인생의 또 다른 이정표

지난달 16일 개막식에 참석한 뒤 최근 귀국한 전 화백은 브루클린미술관 초대에 대해 “한국적 감수성인 포용과 사랑, 정(情)을 오래된 한지로 감싼 게 주목받은 것 같다”며 “미술 인생의 또 다른 시작을 알리는 이정표”라고 소감을 밝혔다.

홍익대 미대를 졸업한 뒤 미국 필라델피아 대학원에서 유학한 전 화백은 지난 30년간 삼각형 크기의 작은 스티로폼을 고서(古書) 한지로 싼 뒤 이를 캔버스에 일일이 붙이거나 설치하는 작업을 해왔다.

미국 추상표현주의에 매달린 40대 초반까지도 국내 화단에서 주목받지 못했다. 1990년대 초 마지막이라는 심정으로 어린 시절 큰할아버지가 운영하는 한의원에서 늘 보아 온 한약 봉지와 한국 고유의 보자기 문화에서 착안한 작품을 내놓았다. 과거 누군가의 삶의 흔적과 영혼이 지문처럼 남겨져 있는 고서를 활용해 한약 봉지 같은 수많은 조각을 화면에 집적했다. 한 개라도 더 주고 싶은 우리네 보자기 문화, 정 문화를 아우른 그의 작품은 수많은 애호가를 열광시켰다.

혁신과 전통, 자연과 문명의 ‘교차로’

국내는 물론 국제 미술계가 전 화백의 작품에 주목하는 이유는 뭘까. 한지 오브제 작업이라는 독창적인 기법을 이용해 개인과 집단의 각기 다른 역사적 사실과 이야기들을 동양 특유의 공동체적 사고로 시각화한 데 주목하는 이들이 많다.

브루클린미술관의 앤 패스터낙 디렉터는 “전 화백 작품은 혁신과 전통의 교차로 사이에 자리한다”며 “수천 권의 고서로 감싼 역사적인 재료로 만들어져 많은 역사와 이야기를 담고 있다”고 평했다. 바르토메우 마리 국립현대미술관장도 “소재와 질감, 그리고 독특한 제작 기법으로 자연과 문명, 전통과 현대를 불러낸다”며 “작품에 켜켜이 스며 있는 시간의 흔적들이 무엇보다 감동적”이라고 강조했다.

“스타보다 휼륭한 작가 되고파”

전 화백은 이제 예술의 마라톤에서 마지막 목표 지점을 향해 숨가쁘게 달리고 있다. 인기 작가보다는 ‘훌륭한 작가’로 남고 싶다는 그는 “유행에 흔들리지 않으면서 자신만의 세계를 우직하게 구축해 가는 모습을 보여 주려 한다”며 웃었다.

그는 “올해는 유난히 특별한 일이 많았다”고 했다. 영국 브리티시뮤지엄에서 그의 작품 두 점을 소장했고 국내 전속 화랑인 PKM갤러리와 뉴욕 첼시의 산다람 타고르 갤러리에서 개인전도 열었다. 지난 10월엔 경기 용인에 미술관 ‘뮤지엄 그라운드’를 개관했다.

김경갑 기자 kkk10@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