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딸로 태어났다.’

이수영 광원산업 회장이 쓴 《이수영 자서전》의 첫 문장이다.

[책마을] 기자로, 사업가로…격동의 시대 살아온 그녀의 기록
1930년대 태어난 이 회장은 한국사의 격동기를 거치며 성장했다. 기자로, 사업가로 파란만장한 삶을 살았다. ‘여성’이라는 수식은 그에게 한계가 아니었다. 당당하게 경쟁해 서울대 법대에 진학했고 신문사에서는 재계를 누비며 특종 기자로 이름을 알렸다.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회사를 그만둔 뒤에는 사업으로 영역을 넓혔다. 돈을 번 뒤엔 기부를 통해 의미 있는 곳에 썼다.

4남 4녀 중 막내로 사랑을 한몸에 받으며 자랐지만 소위 ‘금수저’ 집안은 아니었다. 일제 강점기, 6·25전쟁 등 한국 현대사의 고난도 그의 성장기에 배어들었다. 사법시험에서 낙방 후 서울신문, 한국경제신문, 서울경제신문 등에서 17년간 기자 생활을 하면서 다양한 계층의 인생을 만났다. 당시의 사람과 경험은 사업가로 변신한 뒤에도 든든한 자양분이 됐다.

무엇보다 재계 인사들 관련 일화와 취재 뒷이야기가 눈길을 끈다. 삼성그룹 창업주인 이병철 회장과는 소장하고 있던 골동품을 취재하기 위해 어렵게 만났다. 정양모 전 국립중앙박물관장과 함께 한 이 회장 인터뷰는 이후 한·일 국교 정상화 10주년 기념 전시로 이어졌다. 당시 ‘한국미술 5000년전’에 이 회장은 삼성에서 소장하고 있던 국보급 보물을 대거 공개해 전시를 빛냈다.

과자로 시작해 시멘트 회사까지 인수하면서 국내 10대 기업으로 회사를 키운 이양구 동양그룹 창업주는 한때 빚쟁이들에게 쫓기는 신세였다. 평소 그가 ‘근면과 성실의 결정체’임을 알고 있었기에 잠적한 그를 설득했다. 마침내 새벽 5시에 만나겠다는 전화를 받고 나간 자리에서 “내게 시간을 달라고 전해달라”며 “채권자들이 어떤 피해도 당하지 않게 하겠다”는 이 창업주의 말을 기사로 전했다. 그는 모든 것이 정리된 후 “이수영 기자가 나를 살렸다”고 말했다.

기자로 필력을 날리던 이 회장이 사업가의 길로 들어선 것은 기자 재직 시절 시작한 주말농장이 계기가 됐다. 대학 학자금과 결혼 비용으로 아버지가 남긴 50만원짜리 적금 통장 2개가 사업 밑천이었다. 농사도 가축도 몰랐지만 ‘살아 있는 걸 키우는 게 그나마 덜 힘들 것 같아’ 목축업을 택했다. 돼지 출하 과잉으로 가격이 폭락했을 때는 국군장병 위문품으로 돌려 이익을 남겼고 우유가 남아도는 ‘우유 파동’ 때는 농림부에 ‘초등학생 우유 무료 제공’을 건의해 판로를 뚫었다. 이 회장은 “사업은 운”이라며 “다만 운이 내 앞을 지나갈 때 누구는 붙잡고 누구는 놓치느냐의 차이”라고 강조한다. 목축업으로 시작해 모래 채취 사업, 여의도백화점 인수를 통한 부동산 사업으로 부를 키웠다. 그리고 2012년 미국에 있는 700만달러(약 78억원) 규모의 부동산을 KAIST에 유증 기부(유언에 의한 유산 기부)했다.

성취의 순간뿐 아니라 시련과 아픔까지 고스란히 드러낸 그의 문장은 담백하다. 포장, 변명, 합리화 등 자서전이 빠지기 쉬운 함정도 비켜 갔다. 이 회장은 책을 “지나온 내 삶의 고백이자 굴곡진 시대의 기록”이라고 설명한다. 하지만 과거형은 아니다. 여든이 넘은 나이에도 매일 여의도로 출근하고 있는 그의 성공기는 지금도 진행형인 듯하다.

윤정현 기자 hit@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