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마을] 소주 빈병 울리는 소리에 아버지 생각…詩 한 편에 울컥
열심히 뛰어봤지만 출발하는 지하철을 잡지 못했다. 그 순간 문 옆에 쓰여 있는 작은 시구는 “뭘 그렇게 서둘러. 숨 좀 돌려봐”라고 말하는 듯하다. 문득 ‘시 한 수 읽을 시간도 없이 앞만 보며 바쁘게 살았나’ 싶은 생각이 든다.

많은 사람이 학창 시절 교과서에 나오는 시만 ‘기계적으로’ 읽어왔다. ‘이 시에서 화자가 말하는 주제는 무엇인가’ ‘이 단어가 내포한 의미는 무엇인가’와 같이 답을 찾기 위한 질문에 익숙한 채 시를 접했다. ‘이 시인은 어떤 기분으로 시를 썼을까. 왜 썼을까’라는 생각 대신 시의 정답만 찾는다.

그렇게 시에서 정답을 찾아온 사람들은 시를 ‘뜬구름 잡는 얘기’ ‘이상적인 얘기’ ‘접하기 어려운 그들만의 세상’으로 여긴 채 마음에서 놓고 살아간다. 하지만 광고 문구, 표어, 포스터가 주는 정보나 교훈적 메시지와 달리 어느 순간 시를 읽으며 울컥하는 마음이 들 때가 있다. ‘맞아 나도 지금 이런 마음이야’ 하는 생각에 시구를 천천히 읽고 또 곱씹어본다. 시엔 머리가 아니라 가슴으로 쓴 뜨거운 감정이 숨어 있기 때문일지 모른다.

‘언론인’이라는 호칭 앞에 ‘시인’이라는 말을 먼저 붙이는 걸 더 좋아하는 저자 고두현 씨가 우리가 몰랐던, 또 가슴으로 느꼈으면 좋을 만한 명시를 한데 모아 《시를 놓고 살았다 사랑을 놓고 살았다》를 내놨다. 단순히 시만 넣은 게 아니다. 저자는 우리가 몰랐던 시 속에 숨어 있는 시인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또 마음속에 그려지는 회화적 이미지를 천천히 또박또박 풀어낸다.

제목처럼 책은 유일한 사랑, 비운의 사랑, 위험한 사랑, 첫사랑과 마지막 사랑 등 다양한 사랑에 대한 시들을 소개하고 있다. 아일랜드 국민시인 윌리엄 버틀러 예이츠는 자신이 사랑했던 여성혁명가 곤의 거부에도 ‘하늘의 융단’이란 시를 통해 끝까지 유일한 사랑을 보여주고 싶었다. 네 살 연상의 여인 루 살로메에게 바친 청년 시인 라이너 마리아 릴케의 시 ‘내 눈의 빛을 꺼주소서’에선 그 숭고한 사랑의 감정에 조용히 눈물을 흘리게 된다. 눈물겨운 순애보로 서로에게 평생 힘이 돼준 엘리자베스 브라우닝 부부의 러브스토리와 괴테가 편지지에 은행나무 잎 두 장을 붙여서 보낸 사연도 흥미롭다.

사랑과 관련한 시만큼이나 인생과 인간관계를 생각하게 하는 시도 있다. 소주 빈병을 입으로 불어 나는 소리를 아버지가 흐느끼는 소리로 들었던 시인 공광규의 시 ‘소주병’엔 자식과 부모를 모두 부양해야 하는 고달픈 50대 아버지들의 애환이 묻어 있다. 중간중간 나오는 저자의 시들 역시 잘 익은 운율과 달관적 화법 속에서 어머니와 아버지, 그리고 지난날을 추억하게 한다.

각 부에 들어 있는 ‘여백’ 같은 하이쿠(5-7-5의 17자로 된 일본 고유의 단시)를 읽는 재미도 쏠쏠하다. ‘홍시여 잊지 말라/너도 젊었을 땐/떫었다는 것을’이란 나쓰메 소세키의 하이쿠에서 짧지만 촌철살인의 지혜와 통찰을 엿보게 된다. 저자는 “시는 주변 풍경뿐만 아니라 내 속의 또 다른 나를 발견하게 해준다. 가던 길 멈춰서서 귀를 기울이면 그동안 잊고 있던 내면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다”고 말한다.

은정진 기자 silver@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