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9년 3월1일 서울에서 시작된 만세운동의 거센 물결은 전국 각지는 물론 국외로도 확산됐다. 미주, 간도, 연해주 등 한인 동포들이 살고 있던 여러 곳에서 시차를 두고 만세시위가 벌어졌다. 3·1운동은 온 민족의 독립 열의를 세계 만방에 과시하며 상하이 임시정부 수립으로 이어졌다. 간도의 룽징(龍井), 연해주의 블라디보스토크와 우수리스크 등지에도 만세운동이 번져갔다. 내년 3·1운동 100주년을 앞두고 한민족평화나눔재단과 함께 연해주와 간도의 항일 유적을 찾아나섰다.
연해주 한인 독립운동의 대부 최재형 선생의 순국 현장으로 알려진 우수리스크 사베스카야 언덕에서 소강석 목사(오른쪽)의 하모니카 반주에 맞춰 재러동포 최나젤르다 씨(가운데)가 ‘아리랑’을 부르고 있다.
연해주 한인 독립운동의 대부 최재형 선생의 순국 현장으로 알려진 우수리스크 사베스카야 언덕에서 소강석 목사(오른쪽)의 하모니카 반주에 맞춰 재러동포 최나젤르다 씨(가운데)가 ‘아리랑’을 부르고 있다.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 고개로 넘어간다~~.”

지난 22일 러시아 연해주 우수리스크 시내에서 좀 떨어진 사베스카야 언덕. 가을비가 부슬부슬 내리는 가운데 나지막하게 노랫소리가 울려퍼졌다. 노래를 부르는 이는 재러동포(고려인) 최나젤르다 씨(83). 한민족평화나눔재단 이사장 소강석 목사(새에덴교회 담임)가 감회에 젖어 하모니카를 꺼내 들었다. 이곳이 바로 연해주 독립운동의 대부였던 최재형 선생(1858~1920)이 일제에 의해 처형돼 순국한 곳이기 때문이다.

함경북도 경원에서 노비의 아들로 태어난 최재형은 아홉 살 때 연해주 연추(얀치헤·현 크라스키노)로 이주해 일찍부터 무기와 식량, 의류 등의 군납 사업을 통해 연해주 최대의 부호로 성장했다. 특히 한인들에게 농사와 축산을 장려하고 생산물을 러시아군에 납품해 일석이조의 효과를 거뒀다. 이렇게 번 돈은 모두 독립운동 자금으로 썼다. 국내 진공작전을 펼쳤던 구한말 의병조직인 동의회 총재, 한인 신문인 대동공보 사장, 한인 실업인 모임으로 위장한 독립운동단체 권업회 초대 회장 등을 맡아 물심양면으로 헌신했다.

최재형 선생이 살던 우수리스크 집.
최재형 선생이 살던 우수리스크 집.
안중근 의사의 이토 히로부미 저격을 지원한 이도 최재형이었다. 안 의사는 거사 직전인 1909년 2월 연추에서 11명의 동지들과 함께 ‘단지(斷指)동맹’을 했다. 왼손 무명지를 잘라 태극기에 ‘대한독립(大韓獨立)’이라는 혈서를 쓰고 이토 처단을 결의했다. 안 의사는 최재형과 거사 계획을 함께 짰다. 최재형의 집에서 사격 연습까지 했다고 그의 딸 올가의 회고록은 전한다.

우수리스크 시내 볼로다르스카야 38번지에 최재형이 마지막까지 살았던 집이 남아 있다. 러시아인 소유였던 집을 재외동포재단의 지원으로 고려인민족문화자치회가 사들여 리모델링 중이다.

일본군은 1920년 4월4일 밤 빨치산을 토벌한다는 구실로 연해주 일대 한인촌을 습격해 무차별 살상하고 방화, 파괴, 약탈을 저질렀다. 이른바 ‘4월참변’이다. 3·1운동 이후 연해주에서 대일투쟁이 활발해지자 대대적인 보복에 나선 것이다. 최재형도 이때 체포돼 다음날 사베스카야 언덕에서 다른 수백 명의 동포와 함께 총살됐다. 비포장길을 10여 분 걸어 올라가야 하는 이곳에 지금은 기념비도 안내판도 없다. 소 목사는 “1962년 정부가 훈장(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지만 선생의 삶과 정신이 너무 알려져 있지 않아 안타깝다”며 “순국 현장을 사들여 비석이라도 세워야 하지 않겠느냐”고 했다.

우수리스크 시내 고리카바 20번지에 있는 제2학교(당시 니콜스크-우수리스크 실업학교)는 러시아 혁명에 자극받은 한인들이 1918년 6월 전로(全露)한족중앙총회를 조직했던 역사적인 장소다. 총회는 이듬해 3월 최초의 임시정부인 대한국민의회로 확대 개편됐고, 나중에 상하이 및 한성 임시정부와 통합됐다. 학교 건물의 출입문 위에 한·러 수교 20주년을 기념해 ‘전로한족중앙총회 결정 장소’라는 표지판을 붙여놨지만, 학생들의 수업에 방해가 된다는 이유로 일반인의 출입이 제한돼 있다.

우수리스크에서 기억해야 할 또 한 명의 독립투사는 이준, 이위종과 함께 고종의 특사로 헤이그에 파견됐던 이상설이다. 13도 의군, 권업회, 대한광복군 정부 등에서 맹활약했던 그는 1917년 눈을 감으며 “조국 광복을 이룩하지 못하고 세상을 떠나니 어찌 고혼(孤魂)인들 조국에 돌아갈 수 있으랴. 내 몸과 유품, 유고는 모두 불태워 강물에 흘려보내라”고 유언했다. 우수리스크에서 자동차로 30분 정도 달리면 닿는 시골마을 라즈돌라니야. 그의 유해가 뿌려진 수이푼 강변에 광복회와 고려학술문화재단이 2001년 세운 유허비가 덩그러니 서 있다.

우수리스크에서 남서쪽으로 약 200㎞를 달려 도착한 크라스키노 시 외곽에 역시 두 단체가 세운 단지동맹 기념비가 있다. 비석 모양이 눈물 같기도 하고 불꽃 같기도 하다.

서울에서 비행기로 2시간이면 닿는 연해주는 최근 한국인이 많이 찾는 여행지로 떠올랐다. 하지만 항일 역사와 유적에 대한 관심은 크지 않다. 질곡의 역사 속에서도 불꽃처럼 타올랐던 독립투사들의 애국혼과 연해주 동포들의 눈물이 안타깝게도 잊혀지고 있다. 3·1운동 100주년을 앞두고 이를 기억해야 하는 이유다.

연해주=서화동 문화선임기자 fireboy@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