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사간동 갤러리 현대에 전시된 서양화가 박민준 씨의 작품 ‘아이카’.
서울 사간동 갤러리 현대에 전시된 서양화가 박민준 씨의 작품 ‘아이카’.
“그림 하나하나마다 이야기가 있는데, 평면 회화는 이를 다 담는 데 한계가 있어요. 이야기를 직접 드러내는 것도 좋겠다 싶어서 글쓰기에 도전했죠. 현실과 비현실의 모호한 경계에서 줄타기하는 현대인들의 모습을 서커스에 빗대어 표현하고 싶었고요.”

서울 사간동 갤러리 현대에서 지난 24일 개인전을 시작한 서양화가 박민준 씨(47)는 “그림이란 단지 개념이나 아름다움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미적인 가치와 문학적 상상력이 어우러져야 한다”며 이렇게 말했다.

홍익대 미대를 졸업하고 도쿄예술대 대학원 재료기법학과연구생 과정을 수료한 박씨는 지난 7년간 뉴욕에서 거주한 후 2015년 귀국해 제주에서 작업하며 화단의 ‘문화인(文畵人)’을 자처해왔다. 지난달에는 미술계 최초로 문학과 회화를 접목한 장편소설 《라포르 서커스》를 출간했다. 곡예에 재능을 갖고 태어나 어느 무대에서건 돋보이던 쌍둥이 형 라포와 그 밑에서 그림자처럼 살아가는 동생 라푸가 겪는 좌절과 슬픔을 차지게 다뤘다. 라포르(rapport)는 두 사람 사이의 긴밀한 교감 혹은 신뢰감을 뜻하는 심리학 용어다. 단순한 언어에 의한 의사소통을 넘어 서로 친밀한 관계의 서커스 단원들의 관계를 빗대어 표현했다는 게 그의 설명이다.

서커스처럼 마술적인 판타지…그림으로 보고, 소설로 읽고
박씨는 6년 만에 마련된 이번 전시의 주제를 소설책 제목과 같은 ‘라포르 서커스’로 정하고 서커스단의 흥미진진한 이야기를 르네상스 회화기법으로 묘사한 회화와 조각 20여 점을 걸었다.

소설을 더 쓰고 싶다는 그는 “현실과 비현실의 모호한 경계에 존재하는 듯한 상황들을 화폭에 표현하노라면 그윽한 이야기가 절로 피어오른다”고 했다. 그래서일까. 그의 그림에는 삶에서 보고 듣고 느낀 서사적인 스토리와 그리스 로마 신화에 대한 이야기, 은빛으로 반짝이는 역사적 일화가 많다.

그는 늘 ‘문학가의 눈’으로 세상과 만난다. 젊은 시절 마음의 창에 각인한 문학적 상상력을 시각예술로 반추하고 되살려낸다. 자신이 상상해낸 이야기에 신화적 이미지 혹은 역사적 일화를 얹어 ‘어디에서도 본 적 없는’ 그러나 ‘존재할 것 같은’ 날것들을 캔버스에 불러낸다. 가상의 서커스단, 사람과 대화하는 파란 원숭이, 머리에서 나무가 자라는 동물 조련사 등이 자주 등장하는 이유다. 박씨는 이런 소재를 ‘마술적 리얼리즘’이라는 단어로 표현했다. “인물들은 현실과 환상 사이 어딘가에 존재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현실에는 결코 존재할 수 없는 인물과 상황들을 납득할 수 있는 하나의 세계로 그려낸 거죠.”

서양 고전회화를 빼닮은 화법 역시 묘한 긴장감을 자아낸다. 뚜렷한 명암 대비를 통한 입체감과 극적인 구도를 연출한 박씨의 그림은 그래서 처음에는 낯익다. 그러나 작가가 빚어낸 형상을 하나하나 뜯어볼수록 그림은 다시 낯설게 느껴진다. 전시는 다음달 25일까지.

김경갑 기자 kkk10@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