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마을] 근현대 격동기 함께한 한국 화교 100년의 시간
화교(華僑)는 해외 이주 중국인 중 중국 및 대만 국적을 보유한 이를 말한다. 귀화해 거주국의 국적을 취득한 중국인인 화인(華人)과 구분된다. 화교는 임오군란(1882년) 때 청나라 군대의 개입 이후 본격적으로 한반도에 정착하기 시작했다. 1944년 7만 명에 달했던 화교는 현재는 2만 명 정도로 줄었다.

《화교가 없는 나라》는 중국인의 한반도 이주가 본격화한 1882년부터 현재까지, 137년간의 시간을 되짚는다. 한국의 근현대 격동기를 함께해온 그들의 사회적 역할과 경제적 영향에 주목했다. 인천대 중국학술원 교수인 저자는 중국 칭화대 화상연구센터 초빙교수로도 활동하고 있다. 화교 연구에 20년을 매달려온 그가 내놓은 기록이다. 100년의 시간을 쪼개 통시적으로 서술하지 않고 주제별로 나눠놓아 지루하지 않게 읽을 수 있다.

대부분 산둥성 출신인 한국 내 화교는 억척스럽고 재주가 좋았다. 한국 근대사에서 경제적 존재감이 컸던 이유다. 대표적인 것이 중화요리점이다. 서울과 인천에서 화교가 차린 중화요리점의 초기 주요 고객은 화교였다. 그 음식이 점차 한국인의 생활로 스며들어 해방 후 완전히 정착됐다. 책에 따르면 1960년대 말 전국 중화요리점은 2400개에 달해 화교의 70%가 이곳에서 일했다. 하지만 이후 화교 중화요리점에 대한 각종 규제와 화교의 해외 이주, 중화요리를 익힌 한국인들의 창업에 따른 경쟁에 부딪혀 주춤했다. 저자는 “1970년대 한국을 떠난 화교가 중국 대륙을 비롯한 세계에 한국식 중화요리의 전도사로 활약하고 있다”고 소개했다.

음식과 함께 양복점과 이발소도 화교들의 기술 기반 업종이다. 식칼과 가위, 면도라는 상징으로 저자는 이를 ‘삼도업(三刀業)’이라 칭한다. 중화요리점에 비해 양복 및 이발업이 생소한 것은 의복과 두발 근대화 덕에 일제강점기 때 융성했지만 해방 후에는 거의 사라졌기 때문이다. 저자는 “삼도업뿐 아니라 포목점 주물공장, 양말제조, 채소 재배 능력을 발휘하면서 근대 초 조선 경제에 큰 역할을 담당했다”며 “건축 기능공으로도 뛰어나 서울 명동성당, 약현성당 건축에 그들의 숙련된 노동력이 크게 기여했다”고 서술한다. 21세기 들어서는 조선족을 중심으로 한 중국의 노동력이 빠르게 늘었다. 서울 대림동엔 ‘신(新)화교’라 부르는 이들이 정착하면서 거대한 상권을 형성했다. 그 덕분에 중국인 관광객이 늘어 주말에만 5만 명이 찾기도 한다. 저자는 화교가 주로 활약한 산업 분야와 그들이 어느 정도의 경제력을 갖고 있었는지, 왜 화교 경제가 쇠퇴했는지도 추적한다. 한국을 거쳐 간 화교의 역사를 통해 다양성의 시대를 살아가야 할 우리의 자세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해보게 한다.

윤정현 기자 hit@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