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5일 영국 런던 소더비 경매장에서 뱅크시의 작품 ‘풍선과 소녀’가 낙찰되자마자 찢어져 사람들이 놀라워하고 있다.  /한경DB
지난 5일 영국 런던 소더비 경매장에서 뱅크시의 작품 ‘풍선과 소녀’가 낙찰되자마자 찢어져 사람들이 놀라워하고 있다. /한경DB
“파괴의 욕구는 창조의 욕구다.”

이 말을 했던 화가 파블로 피카소도 미처 상상하지 못했을 것 같다. 자신의 완성작을 대중 앞에서 공개적으로 파괴하는 일 말이다. 그라피티를 주로 그리는 세계 최고의 거리예술가로 꼽히는 뱅크시가 지난 5일 영국 런던에서 이 일을 해냈다.

이날 뱅크시의 작품 ‘풍선과 소녀’는 런던 소더비 경매장에서 104만파운드(약 15억원)에 낙찰됐다. 낙찰봉 소리가 울리는 순간, 갑자기 그림이 세로로 잘려나갔다. 뱅크시는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에 피카소의 말을 인용하며 이 영상을 올렸다. 액자에 파쇄기를 설치했던 장면, 그림이 파쇄되자 사람들이 깜짝 놀라는 장면을 담았다. 그는 “경매에 부쳐질 것을 대비해 몇 년 전 파쇄기를 설치했다”고 말했다. 뱅크시는 사회적 약자, 예술과 자유를 억압하는 권위를 풍자하는 작품활동을 해왔다. 미술 작품의 완성이 그림값으로 재단되는 경매 시스템에도 강한 회의감을 나타냈다. 그런 그가 직접 작품을 파괴함으로써 ‘예술을 완성했다’는 것이다. 이날 소더비의 유럽현대미술 책임자인 알렉스 브랜식이 한 말은 미술계와 대중이 느낀 신선한 충격을 잘 드러낸다. “우리는 뱅크시당했다(We’ve been Banksy-ed).”

뱅크시뿐만 아니다. ‘파괴가 만드는 예술의 역사’는 계속되고 있다. 미술, 음악, 건축 등 모든 분야에 해당된다. 이 파괴는 단순한 ‘장난’이 아니다. 누군가는 “저런 게 예술이면 나도 할 수 있어”라고 말한다. 하지만 누구나 쉽게 하지 못하는 행위다. 이런 파괴는 또 예술가와 관람객에게 질문을 던진다. “당신들이 알고 있는 예술이 정말 예술의 전부인가”라는.

예술에 절대 법칙은 존재하지 않는다. 하지만 사람들 머릿속엔 정형화된 틀로 예술이 존재하는 것 또한 사실이다. 그림을 그리라고 하면 자연스럽게 원근법을 떠올리고 스케치를 시작하는 것처럼 말이다. 원근법은 움직이지 않고 한 방향에서 바라본 뒤 그대로 투사한다. 그런데 왜 시점을 하나로 고정시켜야만 할까. 여러 시점을 가져도 되지 않을까. 이 질문에서 출발한 것이 ‘역원근법’이다. 이동하면서 사물을 바라보면 양옆, 위아래를 화폭에 다 담을 수 있다. 15~17세기 러시아 화가들은 역원근법을 사용했다. 후기인상파 프랑스 화가 폴 세잔도 역원근법으로 다양한 시점을 투영해 ‘생 빅투아르 산’ 등을 그렸다.

이후의 현대미술은 파괴의 강도와 속도를 높여 갔다. 소변기에 서명만 한 채 ‘샘’이란 제목을 붙여 전시한 마르셀 뒤샹, 죽은 상어를 유리 진열장 속에 매달고 모터로 연결한 데미안 허스트 등을 ‘파괴자’로 부를 수 있다. 물론 악동처럼만 보일 수도 있다. 하지만 예술의 역사는 이들을 기억하고 ‘거장’이라 칭한다. 그들이 파괴를 통해 던진 물음은 예술의 본질에 대한 상상력을 자극했다. 뒤샹은 이런 질문을 했다. “왜 직접 만든 것만이 작품인가.” 예술의 본질이 무엇을 만드는 행위가 아니라 창의적 생각 자체에 있다는 것을 지적하는 말이다.

파괴가 던지는 질문이 때론 아프고 충격적일 수 있다. 하지만 새로운 물결을 거부하다가 예술의 본질 밖으로 내몰릴지도 모른다. 낭만주의 교향곡의 대가 요하네스 브람스와 기존 교향곡의 틀을 깼던 구스타프 말러의 대화 한 토막이 여기에 딱 들어맞는다. 두 사람이 개울가를 산책하던 중 브람스는 새로운 사조의 등장에 투덜댔다. “음악은 이제 끝났네. 요즘 나오는 작품들은 진정성이 없어.” 그러자 말러가 개울을 가리키며 말했다. “선생님, 저기 마지막 물결이 흘러오고 있군요.” 브람스는 뭔가를 깨달은 듯 웃었다. 예술에 마지막 물결은 없으며 끊임없이 새로운 물결이 밀려들고, 또 그래야만 한다. 오늘도 예술의 역사는 파괴가 줄 신선한 충격을 기다리고 있다.

hkkim@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