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세기 후반 농촌에 등장한 양반… 대규모 노비 거느리며 농장 경영
품관의 출현

조선왕조의 국가체제가 정비된 1460년대를 전후해 농촌사회에는 양반이란 새로운 지배 신분이 모습을 드러냈다. 양반은 원래 문반(文班)과 무반(武班)의 관료를 말했다. 고려의 양반은 국인으로서 개경에 집결한 지배공동체의 중심을 이뤘다. 농촌에는 양반이 없었다. 고려 말기에 개경의 양반은 경기도와 충청도로 내려가 토지를 개간하고 농장을 설치했다.

그들의 압력에 밀려 옛 지배세력인 토성(土姓)은 유망(流亡)했다. 전라도와 경상도에서 토성은 건재했다. 남부지방의 토성은 14세기 후반 홍건적과 왜구의 침입을 맞아 군공을 세우거나 여러 경로로 하급 군직이나 잡직을 취득해 개경으로 진출했다. 중앙과 지방의 인적 교류는 왕조의 교체기에 더욱 활발했다. 역성혁명과 뒤이은 정치적 격변은 많은 양반을 농촌으로 내몰았다. 그들은 다양한 연고를 좇아 멀리 경상도와 전라도에까지 진출했다. 그렇게 출현한 농촌사회의 새로운 지배세력을 가리켜 품관(品官)이라 했다.
전북 장수군 장수향교. 1407년 건립 당시 건물 그대로 보존되고 있다. 보물 272호.
전북 장수군 장수향교. 1407년 건립 당시 건물 그대로 보존되고 있다. 보물 272호.
중앙군의 해체

조선왕조는 농촌 품관에게 5∼10결의 군인전을 지급했다. 그 보답으로 품관은 1년에 3개월씩 한성으로 올라와 중앙군으로 복무했다. 갑사(甲士), 별시위(別侍衛), 친군위(親軍衛) 등이었다. 일정 기간의 복무를 마치면 관료로 출세하는 기회도 제공됐다. 이런 관계가 유지되는 한 농촌 품관이 원래 지녔던 국인으로서의 정체성도 이어졌다.

15세기 후반 이래 다른 과전(科田)과 마찬가지로 군인전은 더 이상 지급되지 않거나 축소됐다. 세조가 정비한 농민군 중심의 진관체제(鎭管體制)에서 중앙군의 위상은 격하됐다. 품관에게 요구된 정기적인 상경(上京)의 책무도 해제됐다. 한성은 고려의 개경과 같은 지배세력의 공동체가 아니었다. 조선왕조는 한성으로의 이주와 그로부터의 퇴출에 아무런 제한을 두지 않았다. 한성은 출입이 자유로운 행정도시로 변했다.

유향소의 등장

군관 나신걸의 한글 편지. 부인에게 농사짓지 말고 ‘어우리’ 줄 것을 당부하고 있다.
군관 나신걸의 한글 편지. 부인에게 농사짓지 말고 ‘어우리’ 줄 것을 당부하고 있다.
이 같은 추세와 더불어 품관 계층은 군현의 행정을 보좌하고 주민을 교화한다는 명분으로 유향소(留鄕所)라는 자치기구를 결성했다. 1406년부터 그 존재가 확인되는 유향소는 중앙정부의 공인을 받지 못하는 가운데 설치와 폐지를 거듭했다. 유향소의 존재가 최종 공인되는 것은 1488년이다. 이즈음에 이르러 조선왕조의 국가체제는 양반의 나라로 바뀌었다. 유향소는 농가에 공물을 배분하고 수취하는 역할을 담당했다. 나아가 성리학의 사회윤리를 향약(鄕約)으로 제정해 농촌의 주민에게 강요했다. 유향소에는 구성원의 이름을 적은 향안(鄕案)이란 명부가 비치됐다. 향안에 이름을 올리기는 쉽지 않았다. 향안은 품관 계층의 특권적 지위를 상징했다.

대조적으로 원래 지방세력인 토성에 유래하는 향리의 사회적 지위는 점차 하락했다. 조선왕조는 향리의 복식을 차별했으며, 그들에게 지급한 과전을 회수했다. 무엇보다 큰 타격을 준 것은 군현의 백성은 수령의 비리를 고소할 수 없다고 한 법의 제정이었다. 이를 계기로 수령과 맞서온 지방세력이 크게 위축됐다. 품관과 향리는 원래 한 덩어리였으나 점차 1등과 2등 신분으로 분화했다.

양반과 상민의 분화

조선왕조의 신분제는 본시 양천제(良賤制)였다. 백성은 크게 양인과 천인으로 나뉘었다. 16세 이상의 성인이 되면 모든 양인은 군인, 향리, 역리 등의 각종 역(役)을 졌다. 관료가 되면 역이 아니라 직(職)을 보유했다. 천인은 노비로서 주인에게 역을 졌다. 품관도 본시 양인으로서 중앙군의 역을 졌다.

중앙군제가 해체되자 품관은 군역의 부담에서 벗어났다. 이전에 소개한 대로 개혁적 군왕 세조는 토지와 노비를 많이 보유한 품관 계층에 군역을 많이 부과하려 했지만 실패했다. 그 대신 품관은 향교에 나가 과거를 준비하는 교생(校生), 업유(業儒), 한량(閑良)의 역을 졌다. 그들로부터 향시에 합격한 생원과 진사가 나오고 문과에 급제한 관료가 배출됐다. 그러자 보병과 선군으로서 보통의 군역을 지는 양인과 구별되는 특권층으로서 양반 신분이 성립했다. 군역을 지는 하층 양인은 상민(常民) 또는 상한(常漢) 신분으로 천시됐다. 조선왕조의 신분제는 양천제에서 반상제(班常制)로 바뀌었다.

농촌 양반의 성립은 지방 간에 불균등한 추세로 이뤄졌다. 전국적으로 반상제로의 이행이 확연해지는 것은 대개 16세기 후반에 들어서였다.
16세기 경상도 풍산현 갈전리 안씨가의 농장 상상도(김언경 그림).
16세기 경상도 풍산현 갈전리 안씨가의 농장 상상도(김언경 그림).
경제적 기반

농촌 양반의 경제적 기반은 대규모 노비와 토지에 있었다. 15∼16세기 남부지방에서 활발하게 전개된 농지의 개간은 다량의 노비 노동을 동원한 양반에 의해 주도됐다. 그리 높지 않은 산과 깊지 않은 계곡에 있는 완만한 기울기의 구릉이 개간의 주요 대상이었다. 높은 산과 깊은 골짜기는 계간(溪澗)의 물을 이용할 수 없기 때문에 적지가 아니었다. 홍수의 위험에 노출된 천변의 평야도 마찬가지였다. 농촌 양반은 개간의 적지를 골라 제언을 쌓거나 보(洑)를 개설해 논으로 일궜다.

16세기 경상도 북부지방의 양반가에 전하는 20여 종의 상속문서에 의하면 노비 재산의 규모는 적더라도 50명을 넘는 게 보통이며, 많게는 300명을 초과했다. 토지 재산의 분포는 더욱 다양한데, 적더라도 200두락(斗落)이며, 최대는 2312두락에 달했다. 두락이란 1말(斗)의 종자를 파종하는 면적을 말하는데, 16세기에는 100∼120평이었다(1평=3.3㎡). 노비와 토지 재산의 규모는 상속주의 지위와 밀접한 관련이 있었다. 상속주가 중앙정부의 관료 출신이거나 그의 아들인 경우 재산의 규모는 월등했다.

농장

양반이 노비 노동을 이용해 토지를 경작한 농사의 단위를 가리켜 농장(農庄)이라 했다. 얕은 야산으로 둘러싸인 동(洞)이나 곡(谷)이 농장의 중심을 이뤘다. 동의 가장 안쪽 높은 곳에 기와로 지붕을 인 양반의 저택이 자리 잡는다. 그 아래로 좌우 야산의 기슭을 타고 노비의 집들이 배치된다. 노비 집의 다수는 여전히 반지하 움집이다. 동 안에는 배추, 무 등 부식의 재료와 면화, 마, 저, 칠 등 가내공업의 원료를 위한 채마밭이 조성된다. 동 밖으로는 넓게 펼쳐진 들이다.

제시된 그림은 16세기 경상도 풍산현 갈전리에 자리 잡은 안씨 양반가 농장의 상상도다. 동 안은 농장주의 저택, 노비의 초가와 움집, 그리고 채마밭이다. 동 밖은 유명한 풍산들이다. 농장에 속한 논이 이 들에 분포했다. 들에 물을 대는 저수지는 유서 깊은 여자지(女子池)다. 동과 들 사이에 정자가 있는데 안호정(雁湖亭)이다. 안동에서 한성으로 오가는 선비들이 이 정자에서 휴식했다. 노비와 토지가 많은 양반가는 이 같은 형태의 농장을 여러 곳에 분산시켰다. 한 곳에 노비와 토지를 과다하게 집중하면 경영의 비효율이 발생하기 때문이다. 농장을 분산시키면 가뭄이나 홍수로부터의 위험을 분산시키는 효과도 있었다.

가작, 작개, 어우리

농장의 경영은 주인이 노비의 노동을 사역하는 방식이었다. 노비에게는 보통 한 달에 1회 식료가 지급됐다. 봄·가을로는 의복 1벌이 지급되는 것이 관례였다. 이 같은 방식의 경영을 가작(家作)이라 했다. 농장의 규모가 커서 가작만으로 감당할 수 없으면 보완책으로 작개(作介)를 행했다. 특정 토지의 경작을 특정 노비에게 할당하는 것이 작개다. 작개의 소출은 주인의 소유였다. 그 대신 작개를 한 노비에게는 사경(私耕)이라는 토지가 지급됐다. 사경의 소출은 노비의 몫이었다. 근세에 머슴에게 연봉을 줄 때 ‘새경’이라 했는데, 그 말의 유래는 사경이었다.

이 밖에 주변의 농민과 ‘어우리’하는 방식이 있었다. 한자 표기로는 병작(幷作)이라고 했다. 어우리는 한 사람은 토지를 내고 다른 사람은 노동력을 내어 합작으로 농사를 지은 다음 소출을 반씩 나누는 관계다. 전국의 토지는 왕토라는 관념이 그런 합작 농사를 성립시켰다고 지적되고 있다. 2011년 충남 회덕에서 나신걸이 부인에게 쓴 한글 편지가 발굴됐다. 1490년대께의 편지다. 나신걸은 군관으로 차출돼 북방으로 가면서 부인에게 전지(田地)를 모두 어우리로 주라고 당부했다. 그렇게 어우리는 농사를 직접 지을 수 없는 경우에 선택하는 관계였다. 양반 농장주도 어우리를 활용했는데, 지배적인 방식은 가작과 작개였다. 어우리가 지배적으로 되는 것은 17세기 후반 내지 18세기부터다.

이영훈 < 前 서울대 경제학과 교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