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마을] 20년간의 발품으로 풀어낸 전국 종갓집 비밀
한 문중에서 맏이로만 이어온 큰집을 종가라 한다. 종가의 맏이로 종가의 대를 이을 자손은 종손, 종가의 맏며느리가 종부다. 종가를 지키고 장손을 따지고 예를 갖춰 제사를 지내는 것은 요즘 젊은 세대에게 지루한 이야기다. 시대의 흐름에 역행하는 관습으로 보는 시각도 있다. 《대한민국 명문종가 100》이라는 두꺼운 책을 마주하면 그런 말이 쉽게 나오지 않는다. ‘발품으로 써내려간 20년간의 대기록’이라는 부제를 보면 더욱 그렇다. 다도, 전통음식 전문가인 저자는 20년간 전국 곳곳을 누비며 종갓집 문을 두드렸다.

요리전문 잡지에 ‘뿌리 깊은 종가의 맛을 찾아서’라는 제목의 글을 연재한 것이 종가 탐방의 시작이 됐다. 제목처럼 종갓집 100여 곳을 찾아 그들의 이야기를 글로 풀어냈다. 고대광실이나 품격을 갖춘 양반 가옥을 탐방 대상으로 삼은 것은 아니다. ‘사람이 살고 있어야 한다’는 것을 원칙으로 했기에 종가를 찾는 일 자체가 쉽지 않았다. 하지만 500여 개의 질문지를 준비하고 종가의 내밀한 문화를 만나는 즐거움을 누리다 보니 어느덧 기록의 흔적도 묵직해졌다.

“작은 호기심이 이끈 종가 탐방이 이토록 긴 여정이 될지는 상상도 못했다”고 저자도 털어놓는다. 종갓집의 모습과 역사를 담은 책은 1300쪽을 훌쩍 넘는다. 종가의 내림음식과 차, 복식 등 생활문화와 전통 관혼상제의 예법, 고택의 아름다운 면모도 글과 사진으로 전한다.

책의 두께가 부담스럽다면 덕수 이씨 율곡 이이 종가와 진보 이씨 퇴계 이황 종가, 나주 정씨 월헌공파와 다산 정약용 종가, 경주 김씨 추사 김정희 종가와 해남 윤씨 고산 윤선도 종가 등 종가의 목차를 보고 선택해서 읽기 시작하는 것도 방법이다.

추석을 앞두고 일찌감치 ‘명절증후군’ 우려가 불거지고 있지만 책에 따르면 명문으로 꼽히는 종가에선 오히려 단출한 제사상을 차린다. 퇴계 선생의 종가에서는 밥, 국, 과일, 단술을 포함해 열두 가지 음식으로 제사를 지낸다. 상에 오르는 음식이 열 가지도 안 되는 종가도 다수다. 제사는 형편에 맞게 지내면 된다는 생각에서다. 올리는 음식보다 중요한 것은 대를 거슬러 내려오는 정신과 전통, 가치를 공유하는 것이다. 종가 사람들은 전통을 배우고 계승하며 자연스럽게 자긍심과 품격을 배운다. 소박한 흔적만 남은 종가를 지키고 있는 사람들이 지닌 당당함의 원천이다.

고리타분한 옛날 사람들의 이야기나 절차와 형식만 중시하는 꽉 막힌 사고가 아니라 종가와 오늘의 우리를 이어주는 지점이기도 하다. “우리가 기억하는 한 역사는 오늘의 삶을 조망하는 현재진행형이 된다는 사실을 체득했다”는 저자의 집필 후기가 와 닿는 이유다. 그들의 삶과 생각을 통해 명문가가 가져야 할 노블레스 오블리주(높은 신분에 상응하는 도덕적 의무)의 철학과 가치를 엿볼 수 있다. 만석꾼 집이었던 밀양 손씨 종가에서 맛볼 수 있는 7첩 반상이나 풀벌레 소리를 들으며 하룻밤 묵어갈 수 있는 진주 강씨 만산 고택 등 여행서 못지않은 쏠쏠한 정보도 얻을 수 있다.

윤정현 기자 hit@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