禮를 통해 지방까지 미친 왕권… 유교사상으로 통합한 신분사회
역성혁명

한국경제사 3000년의 시간 여행은 지금부터 15∼19세기 조선왕조 시대로 들어선다. 1392년 7월 고려왕조의 마지막 왕 왕요가 회군공신 이성계에게 왕위를 넘겼다. 역성혁명이었다. 조선왕조는 유교를 국시로 삼았다. 한국문명사에서 불교의 시대가 물러가고 유교의 시대가 열렸다. 새로운 시대에서 사회는 지배와 예속의 신분질서로 분열했다. 토지가 개인의 사유재산으로 성립했으며, 소규모 가족경영이 발달했다. 신분으로 갈라진 사회는 유교의 이념으로 통합됐다. 그 속에서 인간들은 보다 나은 지위에 도달하기 위해 투쟁했다. 그 몸부림의 과정에서 현대 한국인의 원형이 빚어졌다.

인구는 1392년 555만 명에서 1810년 1838만 명으로 세 배 이상 증가했다. 그에 상응해 경지가 확충되고 이용이 심화했다. 농촌시장도 성립했다. 조선 5세기에 걸쳐 경제는 세기에 따라 기복이 있지만 전반적으로 성장했다. 1인당 소득수준이 개선됐는지는 의심스러운 ‘맬서스의 시대’였다.

이씨 왕가의 내력

‘팍스 몽골리카’의 시대에 만주의 대부분은 웃치긴 왕조의 지배하에 있었다. 웃치긴은 칭기즈칸의 막냇동생이다. 웃치긴의 판도에는 다수의 고려인이 여진족과 섞여 살았다. 이성계의 가문도 그러했다. 1255년 이성계의 고조 이안사는 웃치긴으로부터 다루가치의 직위를 하사받았다. 이후 동 직위는 이성계에 이르기까지 5대에 걸쳐 계승됐다. 이 가문이 고려왕조에 속하는 것은 1359년 공민왕이 쌍성총관부를 공격해 고토를 수복할 때 그 지역의 이자춘이 호응해 큰 공을 세우면서부터다. 이자춘과 그의 아들 이성계는 고려의 관직을 부여받았다. 이후 이성계는 고려 조정의 실력자로 부상했다. 그의 권력은 고려의 정규 중앙군에 기반을 두지 않았다. 이성계의 친병 가별초군(家別抄軍)은 몽골식 기마전투와 거친 산악지대에 잘 훈련된 여진족을 핵심 전력으로 했다.

1388년 요동을 장악해 온 몽골 세력이 신흥 명(明) 제국에 항복했다. 고려와 국경을 맞댄 명은 이전의 쌍성총관부에 철령위를 설치해 명의 직할령으로 삼겠다고 고려에 통고했다. 고려는 요동을 정벌하기 위한 군사를 일으켰다. 이성계가 그 선봉을 맡았다. 팍스 몽골리카의 변방세력으로 입신해 국제정치 변화에 적응해온 군사가문으로서는 무모한 전쟁이었다. 이성계는 군대를 돌려 고려의 조정을 장악했다. 때를 같이해 웃치긴 역시 영토에 대한 지배권을 인정받는 조건으로 명에 항복했다. 군대를 돌린 이성계의 국제감각이나 살아남기 위한 전략은 웃치긴과 다를 바 없었다.
조선왕조 태조 이성계의 초상화(국보 제 317호). 전주 어진박물관 소장.
조선왕조 태조 이성계의 초상화(국보 제 317호). 전주 어진박물관 소장.
집권체제의 정비

신라와 고려는 왕도에 집거한 지배공동체가 지방의 예속공동체 위에 군림하는 군사국가였다. 조선은 전국을 관료제적 행정체제로 통합하고 지배한 영토국가였다. 지방행정체제는 도→군현→면→리의 관료제적 서열로 정비됐다. 고려의 군현과 향·부곡은 1100개가 넘었다. 조선은 그것을 335개 군현으로 통합했다. 향·부곡은 모두 폐지됐다. 모든 군현에는 예외 없이 수령이 파견됐다. 고려의 군현을 지배해 온 호장을 위시한 지방세력은 현저히 약화됐다. 조선왕조는 지방세력을 향리 신분으로 규정하고 차별했다. 향리가 지방민에게 행세해 온 기득권은 범죄로 규정됐다. 나아가 군현의 백성은 수령의 불법행위를 고소할 수 없다는 법이 제정됐다. 이를 계기로 향리는 하등 신분으로 전락했다.

군현 아래의 행정단위는 면과 리였다. 면은 군현의 영역을 몇 개의 방위로 구분한 형식적인 것에 지나지 않았다. 실질적인 행정단위는 리였다. 리의 총수는 대략 6000을 헤아린 것으로 보인다. 리는 주민의 공동노동이 조직되고 공동의 제사와 축제가 영위되는 공동체였다. 고려까지 농촌사회의 공동체적 통합은 군현을 범위로 했는데, 조선에 들어와 리가 군현을 대신했다. 중앙정부도 국왕을 정점으로 하는 집권체제로 정비됐다. 고려왕조에서 최고 의결기구는 70∼80명의 귀족이 참가하는 도평의사사였다. 조선의 태종은 도평의사사를 해체하고 그 기능을 이·호·예·병·형·공의 6조로 분산했다. 6조의 판서는 그의 정무를 국왕에게 직접 보고했으며, 직접 국왕의 결재를 받았다. 6조를 통할하는 의정부가 있지만 국왕을 견제하는 독자의 권한을 갖춘 기관이 아니었다. 왕권의 절대성은 성리학의 정치이념에 의해 지지됐다. 성리학의 세계에서 국왕은 지극한 이치인 하늘을 대신해 인간 세상을 다스리는 불가침의 권위였다.

중화세계로의 편입

조선이란 국호는 기자조선(箕子朝鮮)에서 유래했다. 조선의 건국세력은 고대 중국의 성인 기자를 계승한다는 도통론을 새로운 왕조의 대의명분으로 삼았다. 이성계가 위화도 회군을 감행하면서 내건 명분은 “작은 자가 큰 자를 거스를 수 없다”는 사대주의의 의리였다. 조선왕조가 스스로를 중화세계의 제후국으로 자리매김하고 국가체제를 그에 상응하는 형태로 재편하는 일은 세종에 의해 완수됐다. 세종은 하늘에 대한 제사를 폐지했다. 고려왕조는 중국과 조공·책봉관계를 맺었지만 하늘에 대한 제사를 고수함으로써 하늘 아래 자존하는 독립국으로서의 정체성을 놓치지 않았다. 대조적으로 조선왕조는 하늘과의 직접적 교섭을 포기했다. 조선왕조는 중국 황제의 책봉을 받고 그에 조공하는 제후국으로서 이상적인 모델을 이뤘다.

고려와 대조할 때 조선왕조의 국례(國禮)가 보이는 또 하나의 두드러진 차이는 예의 주체가 넓게 사회화 또는 지방화했다는 점이다. 고려에서 예의 주체는 중앙정부와 국인에 한정됐다. 지방과 향인은 예의 주체가 아니었다. 군사국가답게 고려는 흉례(凶禮)를 제정하지 않았다. 군왕과 부모의 죽음을 맞아 2년간이나 길게 상복을 입어서는 군사에 충실할 수 없기 때문이다. 고려에서 흉례는 약식으로 치러졌다. 대조적으로 조선에서 지방은 중앙과 마찬가지로 예의 주체를 이뤘다. 농촌의 사대부와 서인은 각종 국례의 거행에 신분별 격식을 갖춰 참여했다. 나아가 개별 가문의 가례가 국례의 일환으로 승격했다. 조선왕조는 중국의 황제를 정점으로 해 농촌의 서인에까지 이르는 예의 국제질서로 자신의 국가체제를 순화시켜 갔다.
1402년(조선 태종 2년) 제작된 동양 최고(最古)의 세계 지도 ‘혼일강리역대국도지도’.
1402년(조선 태종 2년) 제작된 동양 최고(最古)의 세계 지도 ‘혼일강리역대국도지도’.
바다가 닫히다

15세기에 들어 동아시아의 국제질서에 심대한 변화가 발생했다. 명 제국이 바다로부터 철수한 것이다. 명은 북방의 유목민을 방어하고 내륙을 개발하는 자족적 농업국가로의 길로 들어섰다. 그 같은 명의 선택은 이후 동아시아의 후퇴와 서유럽의 추월을 예고하는 세계사적 사건이었다. 명은 바다에서의 자유통행을 금지했다. 명과 조선과의 사행(使行)은 반드시 육로를 통했다.

조선왕조도 이 같은 국제질서의 변화에 순응해 바다로부터 철수했다. 15∼16세기에 걸쳐 조선왕조는 제주도를 제외한 모든 섬의 인구를 강제로 비우는 공도(空島) 정책을 취했다. 나아가 10리 밖의 바다로 나가는 항해를 왕토로부터의 무단이탈로 간주해 처벌했다. 이전에 소개한 대로 신라와 고려의 바다는 활발하게 열려 있었다. 그 바다가 조선에 이르러 높은 쇄국의 장벽으로 바뀌었다.

1402년 한 장의 경이로운 지도가 그려졌다. 혼일강리역대국도지도(混一疆理歷代國都之圖)다. 경이롭다고 한 것은 아프리카 대륙을 그려 넣은 세계 최초의 세계지도이기 때문이다. 최근의 연구에 의하면 지도에 표기된 중앙아시아 서쪽의 지명은 모두 224개인데, 그 가운데 유럽 방면이 34개, 아프리카 방면이 15개다. 조선의 엘리트들이 이 같은 세계지도를 그릴 수 있었던 것은 그들이 합성한 중국의 지도가 그런 정보를 담았기 때문이다. 그 원류는 원 제국이 그린 세계지도로 거슬러 올라간다. 조선왕조의 세계 인식이 열려 있었던 것은 팍스 몽골리카의 유산이었다.

이 지도가 경이로운 다른 이유는 한반도를 얼추 온전하게 그린 최초의 지도이기 때문이다. 동해의 여러 섬은 울릉도를 제외하곤 환상이다. 우산도가 그려져 있지 않음은 그에 관한 환상이 미성립 상태임을 전하고 있다. 어쨌든 조선의 관료들은 중국을 세계의 대부분으로, 조선을 세계 제2의 대국으로 그렸다. 남쪽 바다에 놓인 일본은 조선의 4분의 1에 불과한 섬나라다. 지도는 중화세계의 아(亞)중심으로서 조선의 국제적 위상을 과시하고 있다. 이른바 소중화(小中華)였다. 이후 바다가 높은 쇄국의 장벽으로 바뀌면서 조선의 세계 인식은 더욱 기형적인 구조로 바뀌어 갔다.

이영훈 < 前 서울대 경제학부 교수 >